시장이 공포에 떨 때 그는 투자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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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 30면

카리브해 섬나라 바하마의 수도 나소에 있는 템플턴 재단 앞에서.

“강세장은 비관적인 분위기에서 시작돼 회의적인 시각 속에서 무르익고, 낙관적인 무드에 젖어 청춘을 보내다 풍요로움과 열광에 빠져 종말을 맞는다.”

‘20세기 최고의 주식투자자’ 존 템플턴

‘투자 거장’인 존 템플턴의 말이다. 그는 지난 8일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주식시장에서 장기적으로 꾸준히 뛰어난 수익률을 거두기는 너무나도 힘들다. 주식시장에서 번 돈을 고귀한 목적을 위해 쓰는 것은 더 어렵다. 그는 생전에 10억 달러 이상의 돈을 기부했다. 자녀들에게는 단 한 푼의 유산도 남겨주지 않았다. 대단한 결단이다.

미국의 경제주간지 머니매거진은 1999년 그를 “금세기 최고의 주식투자자”로 선정했다. 그가 숨을 거둔 뒤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세계 언론들은 그의 부음기사에서 “위대한 투자자이자 박애주의자가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템플턴을 소개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일화가 있다. 다름 아닌 그의 오늘을 있게 한 첫 번째 투자성공 사례다. 그가 지질탐사 회사에서 근무하던 1939년 9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증권회사에 전화를 걸어 1달러 이하로 거래되는 모든 종목을 100달러어치씩 매수해 달라고 주문했다. 104개 종목에 1만 달러를 투자했다. 4년 뒤 주식가치는 4만 달러가 됐고, 이 돈으로 그는 자신의 투자자문회사를 만들었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템플턴의 ‘1달러 미만 저가주 투자 성공담’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템플턴의 진면목이 숨어 있다. 대공황의 그림자가 아직 짙게 드리워져 있던 시기였다. 그것도 사상 최악의 전쟁이 될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알리는 포성이 울린 시점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경제의 속사정을 꿰뚫고 있었다. 미국이 곧 군수물자를 연합국에 공급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계류 등 자본재뿐 아니라 원자재, 각종 서비스의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나 2류나 3류 기업들도 이익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저가주 사냥에 나선 것이 아니라 충분한 준비와 분석을 통해 ‘비관적 분위기’를 투자의 기회로 활용한 것이다.

템플턴은 월스트리트의 투자가들이 세계로 눈을 돌리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요즘 한국 투자자들에게도 붐처럼 인기를 끌고 있는 해외 투자를 이미 40년대부터 벌였다. 특히 60년대 후반 일본에 집중 투자하기 시작했다. 투자 규모가 뮤추얼펀드 가운데 절반에 이를 정도였다.

그 시절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를 타고 전후 잿더미를 탈출하기는 했지만, 세계 경제에서 아직은 미미한 존재였다. 도쿄증권거래소가 개장한 49년 당시 닛케이 평균주가는 179였고, 70년대 초까지 도쿄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은 전부 합쳐도 IBM 한 회사에도 못 미쳤다. 그가 일본 주식에 집중 투자하기 시작한 68년 도쿄 주식시장에 상장된 주식의 주가수익비율(PER)은 평균 3배로 미국의 15배에 비해 턱없이 낮았다.

그러나 템플턴의 예측대로 도쿄 주식시장은 80년대까지 그야말로 최고의 활황세를 구가했다. 마침내 86년 도쿄 주식시장 상장종목의 평균 PER이 30배를 넘어서자 그는 보유 주식을 처분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PER이 75배까지 갈 것이라는 낙관론이 지배적이었다. 사실 닛케이 평균주가가 89년 말 3만9000선을 넘어선 것을 감안하면 그의 매도 타이밍은 조금 빠른 듯했다. 하지만 닛케이 평균주가는 그 후 2년 만에 1만4000선까지 떨어져 반토막났고, 2000년대 들어서는 1만 선 밑으로 추락했다.

그는 한국 주식시장과도 인연이 깊다. IMF 위기가 정점에 달했던 98년 1월 초, 그가 한국 주식시장에 투자한 사실이 알려지자 월스트리트는 한국 시장을 다시 바라보게 됐다. 말년에 그가 가졌던 주요 언론과의 인터뷰 기사를 읽어보면 꼭 한국 이야기가 나온다.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했던 2004년에는 중국 투자붐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중국의 성장세는 놀랍다. 30년 후면 경제 규모에서 미국을 추월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 주식시장은 정보가 부족하다. 주가는 낮지만 리스크가 높다. 반면 한국 주식시장은 여전히 싸지만 리스크는 높지 않다.”

그는 미국 주식시장이 ‘닷컴 버블’에 휩싸여 있던 99년에 미국 주식을 전부 판 것으로도 유명하다. 2004년 인터뷰에서 그러면 요즘 어디에 투자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바로 지난주에 일본 엔화에 숏포지션(매도) 투자를 하고, 한국 원화에 롱포지션(매수) 투자를 했다.” 그 이후 한국 주식시장과 중국 주식시장, 한국 원화와 일본 엔화가 어떤 궤적을 그렸는지 한번 떠올려보라. 92세 노인의 혜안치고는 너무 놀랍지 않은가.

템플턴의 투자철학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템플턴은 가치투자자다. 역발상 투자자다. 항상 유연한 자세를 견지했다. 세 가지 모두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했다. 이 세 가지 투자철학은 모두 그의 생활습관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보다 검약했고 성실했고 건강한 삶을 살았다. 젊은 시절부터 소득의 절반은 무조건 저축했고, 사무실 집기는 중고품으로 썼으며, 재산이 25만 달러가 넘기 전까지 대당 200달러가 넘는 자동차는 사지 않았다. 한 주에 80시간 이상 일했고, 90세가 되기 전까지 매일 한 시간씩 수영했다.

그는 독립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스스로 60년대에 바하마로 사무실을 옮겼다. 맨해튼에서 일하면 군중 심리에서 벗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모두가 절망적으로 주식을 내다팔 때 매수하고, 모두가 앞다퉈 주식을 살 때 매도해야 한다. 그러려면 군중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게 낫다.”

그는 매일 아침 기도와 함께 일을 시작하고, 중요한 투자결정을 내리기 전에도 기도를 한다. “기도를 함으로써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정신은 평온해진다. 기도를 할 때는 주위의 바깥 세상에 대해 눈을 감아야 하고, 자연히 우리의 에너지를 한곳에 집중할 수 있다.”

한 세기를 살다간 템플턴이 주식투자자에게 던져준 정말로 중요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주식투자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삶의 목표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신이 주신 자신의 재능을 ‘잘못된 투자결정을 내리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쓰기로 하고 투자업계에 뛰어들었다. 템플턴 그로스 펀드는 100만 명 이상의 미국 중산층이 주식투자로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92년 자신의 펀드회사를 매각한 뒤 그는 “인류애의 증진과 영적 자산의 탐구”라는 더 고귀한 목표를 위해 자신의 전 재산과 모든 시간을 바쳤다. “당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재산은 결코 당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당신은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이 재능과 재산을 잠시 빌려 쓰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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