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피치] 152. 힘들 때 힘이 되는 '친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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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 온 아홉살 소년에게는 모든 게 낯설었다. 초등학교 2학년. 권오준은 고향 강화도를 떠나 서울 화곡초등학교로 옮겼다. 부모와 헤어져 고모집에서 지냈다. 모든 게 신기하고 어리둥절하던 때였다. 그때 낯선 환경과 그를 친숙하게 해준 것은 친구였다. 친구가 생기면서 학교가 재미있어졌고 서울이 익숙해졌다.

그 친구의 이름은 손시헌.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유난히 친근했다. 금방 친해진 둘은 마냥 붙어다녔다. 3학년 때 둘은 다른 반이 됐다. 그래도 붙어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손시헌이 "우리 야구부에 들자"는 제안을 했다.

권오준은 망설였다. 부모님의 허락도 필요했다. 그러는 사이 손시헌은 야구를 시작했다. 권오준도 운동을 좋아했고 결국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냈다. 4학년 때부터 둘은 야구도 같이했다.

선린인터넷고까지 단짝으로 붙어다녔던 둘은 졸업하면서 헤어졌다. 1999년이었다. 삼성의 지명을 받은 권오준은 계약금 2억4000만원을 받고 프로야구 선수가 됐지만 손시헌은 프로의 지명을 받지 못하고 부산 동의대로 진학했다.

손시헌에게는 프로야구 선수가 되지 못한 게 좌절이었지만 프로에 입단한 권오준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팔꿈치가 아팠다. 그는 "아령은 물론 가방도 들지 못했다. 숟가락질도 겨우 할 정도였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해서 눈물도 많이 흘렸다"고 했다. 수술대에 올랐다. 병상의 권오준에게 친구 손시헌의 위로는 또 한번 큰 힘이 됐다.

둘은 서로 용기를 북돋웠고, 서로를 지켜줬다. 회복한 권오준은 군에 입대했다. 어차피 재활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 손시헌은 동의대를 졸업하고 꿈꾸던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연습생으로 두산의 테스트를 통과했다. 2003년 여름부터는 주전 유격수가 돼 매스컴에도 자주 오르내렸다.

군복무를 마치고 삼성에 복귀한 권오준도 친구의 성공에 힘을 얻었다. 손시헌은 "그때처럼 같이하는 거야"라며 용기를 줬다. 권오준은 지난 8일 광주 기아전에서 프로데뷔 첫 승리를 올렸다. 실패와 좌절의 어둠에서 벗어나 6년 만에 따낸 달콤한 열매였다. 감격에 들뜬 그에게 친구 손시헌의 축하전화는 너무나 당연했다. 둘은 "우리가 해냈다. 이제 더 잘하자"라며 기뻐했다.

권오준-손시헌의 경우처럼 친구는 어려울 때 힘이 돼주고 즐거울 때 기쁨을 함께한다. 그 과정에서 우정은 깊어지고 존재는 소중해진다. "나를 위해 죽어줄 수 있는 친구 세 명이 있다면 부러울 게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난주 인상을 찡그리게 한 삼성 노장진의 음주 이탈 파문도 친구의 의미와 존재를 되새기게 해주는 사건이었다. 노장진에게는 고민을 함께하고 의지할 만한 친구가 없다. 오죽하면 그날 함께 술 마신 동료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재일교포 고지행이었겠는가. 노장진은 외로웠고, 뭔가 감정을 분출하고 싶은 탈출구가 필요했지만 곁에는 그를 다독여줄 친구가 없었다.

친구를 생각하는 봄이다. 모 보험회사의 CF에서 빙긋이 웃으며 "거친 들판으로, 달려가자"라고 노래부르는 영화배우 최민식의 얼굴이 '친구'로 다가온다.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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