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대통령이 ‘전면 대화’ 제안한 날 … 남북관계 대형 악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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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11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이 발생한 지역의 위성사진을 살펴보고 있다. 박희태 대표, 김중태 통일부 남북교류협력국장, 홍양호 통일부 차관(오른쪽부터) 등이 배석했다. [연합뉴스]

남북 관계에 대형 악재가 터졌다. 남측 민간인의 방북이 상시 허용되는 북한 지역은 금강산 관광특구와 개성공단이다. 이들 지역이 남측에 개방된 뒤 우리 국민이 북한 측의 위해로 사망한 건 처음이다. 더구나 북한군의 총격으로 사망했다는 점에서 향후 남북 관계에 미칠 충격이 만만치 않다. 정부는 일단 잠정적인 조치로 12일부터 금강산 관광을 중단시켰다. 하지만 정부의 진상조사에 북한이 성실하게 응하지 않을 경우 남북 간엔 대화 단절을 넘어 대표적인 교류 협력 사업인 금강산 관광의 장기 중단 사태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지난해에만 34만5000여 명이 방문했던 금강산 관광지구의 장전항은 예전 북한의 잠수함 출항지로 군사기지였다. 현재에도 장전항 주변 산엔 북한군 포대가 설치돼 있다고 한다. 그러나 보안을 이유로 관광객을 억류한 적은 있어도(1999년 6월) 관광객에게 총격을 가한 사례는 정부에 보고된 바 없었다. 지금까지 금강산에서 발생한 사건·사고도 남측 인사의 음주운전으로 북한군 초병이 숨지거나 관광객이 심장마비 등으로 사망한 경우는 있었으나, 관광 중단 사태가 벌어질 만큼 심각한 경우는 99년 6월 억류 사태 외에는 없었다.

그러나 새 정부 들어 북한 군부는 지난달 22일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에 대해 경고 메시지를 냈다. 남북 군사회담 북측 대변인 명의의 담화를 발표해 “(지난해 합의한) 통신·통행·통관 확대의 3통 합의를 반년이 넘도록 이행하지 않고 있다”며 “우리 군대는 (금강산과 개성공단에서) 협력 교류 사업을 그대로 추진하기 위해 군사적 보장 대책을 계속 따라 세워야 하겠는가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틀 후 북한은 개성공단 출입 시간을 축소했다. 이 때문에 이번 총격 사망사건도 남북 관계가 경색되자 북한 군부가 전과 달리 금강산 현지에서 보안활동을 대폭 강화하며 벌어진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이번 총격 사망사건은 목격자에 남측 인사가 없어 북한 측의 성실한 조사 협조 없이는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기 어려운 상황이다. 따라서 북측 태도 여하에 따라서는 정부가 추진 중인 옥수수 5만t 대북 지원이나 향후 쌀·비료 지원에까지 여파가 미칠 수 있다. 아직까지는 유지되고 있는 민간 채널의 남북 접촉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한 대북 전문가는 “북측이 지금처럼 당국 간 접촉을 거부하며 남측에 책임을 돌릴 경우 향후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대북 정책의 범위는 극히 제한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허탈한 청와대=청와대 관계자는 이날 “(이번 사고는) 기본적으로 심각한 상황이지만 진상 파악이 안 된 만큼 금강산 관광 중단이라는 확실한 조치를 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부에선 당혹감이 역력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날 국회 개원 연설에서 6·15 선언과 10·4 선언을 언급하며 ‘남북 간의 전면 대화’를 강조하고, 대북 정책의 방향 전환을 밝힌 시점에 총격 사망사건이 터지자 악재를 만났다는 표정이다. 한 관계자는 “의욕적으로 준비했는데 운이 없어도 너무 없다”고 토로했다.

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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