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책] 피비린내 속에서도 노래의 꽃은 피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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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내면을 파고 든 『칼의 노래』와 더불어 김훈류 역사소설의 또 다른 장이라고 할 만하다. 그만큼 두 소설은 서로 닮았다. 아마도 그에게 있어 충남 아산 현충사 내 이순신 장군의 사당을 서성이는 심사와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안의 악기박물관을 기웃거리는 감회는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칼에서 현을 보고, 현에서 칼을 보았다고 한다. 그 둘은 결국 하나라는 것이다.

이 쉽지 않은 통찰 때문일까. 우리가 『현의 노래』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유현한 악기의 세계가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이다. 김훈은 우륵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모든 것을 버렸다. 아취와 우아 대신 시취(屍臭)와 난장이 우리를 맞는다. 도처에 죽음이 있다. 왕이 죽으면 한번 장사지낼 때마다 쉰명 정도의 순장자들이 죽은 왕을 따라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고, 썩은 시즙(屍汁)이 스며드는 들판에는 적군과 아군을 가릴 수 없는 시체들이 낟가리처럼 쌓여있다. 때는 서기 540년께, 신라 진흥왕이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삼아 내외군사의 일을 맡기고 백제와 기나긴 싸움을 시작하며 가야를 병합하던 시기다.

김훈은 우륵의 ‘예술’ 대신 우륵이 산 ‘세상’을 택했다. 세상은 우륵의 시대로부터 이순신의 그것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 권력은 더 많은 권력을 탐하고 더 많은 권력은 더 많은 대가를 요구한다. 누군가는 권력의 덧없음에 몸을 떨어야하고 또 누군가는 권력의 전횡에 몸이 부서져야만 한다. 우륵은 이 세상을 살았다. 그리고 그 세상 속에서 노래를 만들어내야만 했다.

이 점은 김훈의 우륵이 대개의 소설에서와 같이 왜 무조건적인 예술적 야망에 불타는 젊은 청춘이 아닌가에 관한 하나의 답이 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순간 우륵은 이미 늙어있다. 그는 일흔의 나이에 이르러 있으며 노래가 세상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소설의 또 다른 축인 대장장이 야로나 신라 병부령 이사부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의 욕망이 지향하는 바는 다르다 하더라도 그들의 욕망이 결국 유한한 시간 앞에 항복하도록 되어 있다는 점에는 예외가 없다.

『현의 노래』는 이 노인네들의 응시로 가득하다. 그러나 노래는 노안으로 바라본 세상 속에서만 터져나온다. 죽음을 눈앞에 둔 왕이 아랫도리를 벗기운 채 기침과 가래를 뱉으며 젊은 시녀들의 흰 목과 등판과 가슴을 훑어내릴 때, 무엇보다도 싸움터 한쪽에서 노을이 지고 있을 때, 노래는 비로소 세상의 유한성을 넘어 영원이 된다.

감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유한성에 대한 승인이다. 이 아수라의 세상에 대한 수용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 승인과 수용을 통해 그것을 넘어서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김훈은 『현의 노래』를 통해 우리를 그 감각의 향연 속으로 인도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노래일까. 강이 끝나고 바다가 열리는 먼 하구의 엷은 비린내를 풍기는 재첩국물, 마른 삭정이가 타들어가는 소리를 내는 젊은 여자의 오줌소리, 여린 바람에도 서걱이는 소리를 내는 대숲. 아마도 『현의 노래』는 이 감각으로 노래가 될 것이다.

신수정(문학평론가)

※ 『현의 노래』는 3월의 책으로 선정됐습니다. 인터넷 교보문고
(www.kyobobook.co.kr)를 통해 ‘4월의 책’추천 리뷰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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