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횡무진인터뷰] ④-<끝> "부산, 가고 싶지요. 하지만 난 지금 한화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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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루지 못한 꿈

- 그 말하고 싶었던 것, 그게 뭘까요?

“제 가슴속에는 뜨거운 불덩어리가 있어요. 가슴을 태우는 그런 불덩어리요. 아직도 그게 남아 있습니다. 그건 아버지와 제가 꾼 꿈입니다. 그 불덩어리를 토해내는 과정이었지요.” (그는 그 불덩어리의 실체에 대해서는 애써 말을 피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을 토해내지 못해 답답해 하고 있는 듯했다. 한국 야구의 최고스타 자리에 있었던 그의 가슴속을 태우는 불덩어리 그것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 그럼 안티구아 의류사업도 같은 맥락인가요? 단순한 ‘쟁이’가 아닌 선친과 최 감독이 함께 이루려고 했던 꿈에 도달하는 과정 같은 것 말입니다.

“맞아요. 나는 내가 부딪히고 경험하려고 했습니다. 안티구아도 미국까지 가서 어렵게 국내 판권을 따고 직접 뛰어 다녔죠.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어요. 그런데 광고가 나가고 난리가 났죠. 전화가 불통이 되고, 직원들이 도망을 가고, 지금 생각하면 평범한 광고인데 당시는 그랬어요. 왜 그랬느냐고요? 당시로서는 빨랐던 거죠. 하지만 누군가는 선두에 서야 하잖아요. 죽을 줄 알면서도 왜 선두에 섭니까. 도망가 버리지. 하지만 누군가는 선두에서 총을 맞아 쓰러지는 이가 있어야 되잖아요.”

(당시 의류업체 안티구아 광고는 요즘 베네통의 광고처럼 백인여자와 흑인남자, 그리고 백인 아이의 뒷모습을 누드로 처리한 것이었고, 그 여파는 엄청났다. 비난이 빗발쳤다. 더구나 광고모델이었던 골프선수 페인 스튜어트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는 불운까지 겹치면서, 그의 사업은 피어보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렸다. 그 점에서 보면 최동원은 늘 반발이 아닌 한 발을 앞서 감으로서 스스로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 그 일로 인해 경제적 위기를 겪지는 않았나요?

“아, 그 문제에는 관심을 가지지 말아주세요. 손해야 있었지만 그것 역시 인생의 한 부분이죠. 성공이나 결과가 중요하지 않았어요. 과정이 중요한 거죠. 그러니 꼭 손해라고 할 수도 없어요. 그 일로 인해 많이 배웠어요.”

(최동원의 외도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후 방송으로 진출하고, 시트콤에도 출연하는 등 그의 좌충우돌식 행적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타인의 눈에 그렇게 비친 것일 뿐, 그는 선친의 유지대로 많은 것을 경함하고 배우는 과정으로 여겼다고 했다.)

- 결혼마저도 최동원다웠다고들 하는데 정말 전격적인 결혼이었죠?

“선수협 파동 이후 미국으로 갈 때였지요. 이종사촌집에서 한번 만났는데, 두어 번 만난 후에 공항에서 집에 전화를 걸어서 느낌이 좋다고 말씀 드렸더니 일주일 후에 함 들어간다고 연락이 왔더라고요. 7번째 만난 게 결혼식장에서였습니다. 그때도 다들 말이 많았는데, 보세요, 지금 잘살고 있잖아요. 선구안이 좋았던 거죠.”

- 아들은 야구를 안 시킨다고 하던데 왜 그렇죠?

“아니, 지금 야구를 하고 있어요. 큰 재능은 없어 보이는데, 자기가 좋다고 하더군요. 야구선수가 되는 길이 너무 힘들어요. 정말 시키고 싶지 않아서 집에서는 야구 얘기를 일체 하지 않았죠. 그런데 어느 날 야구를 하고 싶다고 하길래 이렇게 말했어요. ‘원하면 시킨다. 하지만 나중에 원망하지 마라. 후회도 하지 마라. 나는 원한 게 아니다. 우리 그 점은 분명히 하자.’ 그랬는데도 하겠다는데 시켜야죠, 어쩌겠습니까.”

6 지도자의 길

- 어느 야구팬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부산은 최동원을 낳았고, 최동원은 부산팬을 낳았다’ 심경이 어떻습니까? 요즘 부산의 야구 열풍을 보면…

“부산은 내 고향이고 뿌리입니다. 어머님이 계시고, 나를 만들어 준 곳이죠. 늘 훈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그 자리에 없다고 해서 섭섭하지는 않습니다.”

- 김인식 사단의 일원으로 한화 1군 투수코치, 이제 2군 감독으로 돌아왔습니다. 만족하십니까?

“최고의 선수였다고 최고의 지도자는 아닙니다. 선수시절의 생각을 가지고 가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지금은 김감독님에게 지도자의 길을 배우고 있습니다, 연습생인 셈입니다. 선수 때는 잘 던지면 그만이지만, 지도자로는 운영이나, 선수특성파악, 지도방법 등을 공부해야 하죠. 그러니 만족하죠. 지난날의 명성은 어디까지나 허상 일 뿐입니다.”

- 그래도 선동열 감독이나 김재박 감독 같이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성공한 분들을 보면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는 않았나요?

“자존심 같은 것은 버린 지 오랩니다. 자리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요. 선수들은 누구나 감독 목표가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본인이 결정하는 것은 아니죠. 내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묵묵하게 내실을 다지고 내공을 쌓으면 저절로 기회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 점에서 저는 아직 부족한 것이고요.”

(야구계를 떠나 10년 동안 야인으로 떠돌던 그에게 손을 내민 사람은 한화의 김인식 감독이다. 김 감독은 그에게 1군 투수코치로 조성민의 부활을 전담시켰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는 여기에 대해 이미 시기적으로 늦은 일이었다고 평했다.)

- 무례한 질문이지만 재산은 얼마 정도 되십니까? 한때 연봉이 강남 아파트를 한 채씩 살 정도였다는데요,,

“재산요, 먹고 살 만큼은 있어요. 재산은 많으면 많은 대로 반대급부가 있어요. 무조건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냥 내가 살기에 적당하면 되죠.”

- 당시 최동원, 선동열 같은 불세출이라는 별명을 붙일만한 선수가 요즘은 잘 안 나옵니다. 이제 지도자 입장에서 왜 그렇다고 보십니까?

“아, 그건 식습관부터 차이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다들 어릴 때부터 고기나 패스트푸드 같은 것을 잘 먹고 해서 예전보다 체격조건은 좋아요. 하지만 과연 내부의 힘이 강한가 하면 그건 아닙니다. 툭하면 부상이고, 고장이죠. 연습강도가 높아지면 그 자체를 이기지 못해요. 연습하지 않는 좋은 선수는 없습니다. 조금만 무리한 연습을 하면 어디가 안 좋다, 어디가 아프다고 하죠. 정신력이 많이 떨어집니다. 결국 지도자도 이런 선수들과 타협 할 수 밖에 없지요.”

- 마지막으로 이제 세상에 길들여 진 건가요? 아니면 아직도 마음속에 무엇인가 엄청난 포부와 음모(?)를 숨기고 있나요?

(순간 그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 “포부, 뭔가는 있겠죠. 하지만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앞으로도 그 뭔가를 안고 살아갈 겁니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롯데 시절 한국시리즈 우승을 꼽았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짜릿하다고도 했다. 그래서 고향 부산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느냐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은 한화 2군 감독이라며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지금 유니폼을 입고 있는 팀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도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쓸쓸했다. 지금 그의 처지는 지도자 수업을 받는 초년병 지도자일 뿐이다. 그는 저간의 사정에 대해 이제는 기다릴 줄 알고 담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고, 또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익혔다고도 했다. 그리고 다른 모습을 기대해 달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정작 그가 가장 간곡히 부탁한 것은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선친 최윤식씨에 대한 세상의 오해를 풀어 달라는 것이었다. 한 평생 아들을 위해 살다간 아버지에 대한 사부곡이 그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지금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자기를 던져 인터뷰어와 거래를 한 것일지도 몰랐다.

글=박경철 donodonsu.naver.com,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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