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해도 격려금 주는 회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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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SK㈜의 생명과학사업부는 7년 동안 200억원 이상 투입한 우울증 치료제 개발 계획을 지난달 접었다. 이 신약 개발에 매달린 연구인력만 40명이 넘는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문책 대신 ‘위자료’와 ‘쫑파티’ 비용을 받았다. SK생명과학이 진행 중인 신약 개발 프로젝트는 15건 정도. 이 중 매년 30% 선인 5~6건이 ‘킬’된다. 연구에 들어간 비용이나 시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최종적으로 신약이 나올 시점의 시장성과 효능이 기준이다. 이 회사 곽병성 본부장은 “연구개발 계획을 중간에 접으면 연구원들은 대개 반발한다. 하지만 안 될 걸 잡고 있는 것은 본인은 물론 회사에도 해롭다”고 강조했다.

이 회사는 일종의 ‘킬링’제도인 ‘스테이지 게이트 시스템(SGS)’을 2006년 도입했다. 이후 12~14년씩 걸리던 신약 개발 기간을 1~2년 단축시켰다. 또 개발 과정에서 연구의 품질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 그 결과 이 회사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고 임상시험 중인 국내 치료제 11건 중 7건을 개발해내는 성과를 냈다. 한국신약개발연구조합의 여재천 사무국장은 “일단 FDA의 임상시험 승인을 받으면 신약으로 개발될 확률이 70~80%에 달한다”며 “SK의 성과는 글로벌 대형 제약업체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SK생명과학의 킬링 시스템은 신약 개발 과정에서 다섯 단계에 걸쳐 시행된다. 먼저 연구에 앞서 신약 발굴 아이디어를 평가한다. 또 시장성과 신약 구성물질 등을 조사하는 리서치 단계, 동물과 사람을 상대로 순차적으로 투여하는 단계별 임상시험에서 이뤄진다. 평가는 연구 책임자는 물론 외부의 시장 전문가, 의약계의 핵심 오피니언 리더, 임상시험 의사 등이 참여한다. 이들은 신약이 나올 시점을 기준으로 약효·부작용·경쟁제품·예상 약물가격 등을 평가한다.

곽 본부장은 “킬링 시스템을 도입한 것은 해외 대형 제약업체에 비해 열세인 연구 인력이나 비용 경쟁력을 만회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글로벌 제약업체와 경쟁하려면 신약 개발 속도를 높이고 성공 가능성이 큰 연구에 집중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글로벌 신약 시장은 2003년 현재 480조원에 달한다. 2015년이면 600조원으로 커질 전망이다.

이런 신약 시장은 화이자나 존슨앤드존슨 같은 쟁쟁한 글로벌 제약업체가 휘어잡고 있다. 이들은 1만 명이 넘는 연구원이 한 해 3조원가량의 연구비를 쓴다. 하지만 국내에서 제법 규모가 큰 것으로 꼽히는 SK생명과학의 연구원은 201명이다. 한 해 연구비도 200억원가량이다. 국내에서 최대 규모라는 LG생명과학의 연구인력도 300명에 불과하다.

SK생명과학이 처음 킬링 시스템을 도입했을 때는 SK그룹 내에서 직원들의 업무의욕과 사기가 제일 낮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SK그룹 모든 계열사 임직원들의 사기나 의욕이 5점 만점에 평균 4.5점이 나왔는데 생명과학부는 3.4점이었다는 것이다. 곽 본부장은 “연구원들에게 우리 경쟁자는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다는 것을 주지시켰다”며 “해외 경쟁업체와 우리의 상황을 인식하면서 이제는 킬링 시스템을 무리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장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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