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10만리>15.태국 도이창 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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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촌장으로부터 리수족 결혼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막 잠자리에 들려는데 밖이 소란하다.무슨 일인가 하고 슬그머니 나가 보았더니관솔불을 밝히고 떡을 만들고 있다.찹쌀을 쪄서 떡메로 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 얘기가 바로 다음날이 리수족의 설이라고 했다.라후.아카.리수족들의 설은 날짜가 엇비슷하다.우리처럼 달력에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설 쇨 무렵이 되면 마을의 추장이길일을 잡아 날을 정한다.
설날 아침 장성한 추장 아들들과 손자들이 추장에게 세배를 올리는 모습을 보다가 놀라 감전이라도 된듯 한동안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바로 리수족이 우리가 찾고 있는 고구려와 마한(馬韓)식 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고구려 사람들은 어떻게 절을 했을까.우선 두손을 모으고왼쪽 다리를 앞으로 내 밀었다.그리고는 오른쪽 다리를 뒤로 뻗었다.오늘날 우리가 절하는 모양새와는 아주 달랐다.고구려 사람들도 리수족처럼 절을 했는지 옛 기록을 통해 알 아보자.
위나라의 위서(魏書)고구려전은 『… 꿇어 엎드려 절할 때는 한쪽 다리를 뻗는다』고 전하고 있다.고구려 사람들은 절할때 먼저 한쪽 다리를 뻗었으니 당연히 리수족처럼 다른쪽 다리를 땅에꿇었을 것이다.아니나 다를까.한쪽 다리를 꿇었다 는 또다른 기록이 보인다.
수나라의 수서동이전(隋書 東夷傳)고구려편에는 『…절을 할때는한쪽 다리를 꿇고,섰을 때는…』이라고 적고 있다.한쪽 다리를 꿇었으니 다른쪽 다리는 뒤로 뻗는 모습이었을 것이다.북사(北史)고구려전에도 『절을 할 때는 한쪽 다리를 뒤로 뻗는다』고 묘사하고 있다.
당시 중국 사람들의 눈에는 고구려 사람들의 절하는 모습이 신기하게 비쳤을 것이다.그래서 위서.수서.북사 등 여러 역사책에고구려 사람들이 절하는 모습을 기록해놓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리수족은 지금도 고구려식 절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사실을 우연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왜냐하면 리수족여인들이 절하는 모습마저 우리의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리수족 여인들은 남자들과는 달리 두손을 공손히 땅에 짚 고 절을 한다.오늘날 우리나라 여인네들의 절하는 모습과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리수족도 설날이 되면 아무리 먼 곳에 나가있어도 반드시 고향을 찾는다.
설날에는 제관(祭官:옛 우리나라의 天君)이 산에 올라가 신이강림할 수 있는 신목(神木)을 베어다가 마을 공터 중앙에 세운다.또 집집마다 개별적으로 집 앞에 신목을 세운다.이 신목에는우리나라의 비파.해금같은 악기를 매단다.신목을 세운 후 새옷을차려입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신목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강강수월래 춤을 춘다.춤이 끝나면 우리나라 농악대에 해당되는 악단이 선두에 서고 마을 사람들이 뒤를 따르며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지신(地神)을 밟아 준 다.집 주인은 우리나라에서처럼 자기집의 지신을 밟아준 마을 사람들에게 음식.술.차 등을 대접한다. 이러한 리수족의 제천의식과 지신밟기가 우리민족의 것과 단순히 똑같다고 말하는 것으론 부족하다.어쩌면 리수족이 신목을세우고,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가해 제천의식을 행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부분까지도 리수족이 보존하고 있다 고 봐야한다. 아무튼 탐사팀은 리수 마을에 완전히 매혹되고 말았다.마음씨 좋은 추장은 탐사팀에게 다음날 마을 무당굿을 보여주겠다고했다. 라후족이나 리수족 마을에는 몇사람의 무당(Shaman)이 있다.특히 리수족 무당은 진짜 무당.우리식으로 말하면 강신무(降神巫)인 셈이다.
리수족 무당은 마을 사람들의 병과 불행을 치료하는 일을 한다.병자가 있는 집에 불려가면 무당은 먼저 조상의 신주 앞에 놓인 그릇의 물을 갈고 향을 사른다.그런 다음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기이한 소리로 휘파람을 분다.무당 자신의 영(靈)을 불러내기 위한 것이다.무당은 계속 혼자 중얼거리면서 그 자신이몽환(夢幻)의 세계로 빠져들어간다.무당은 몽환 세계에서 마치 말을 타듯 영에 올라탄다.이어 무당은 무의식 상태가 돼 그 자리에 쓰러진다.그것은 환자의 영을 자신의 영속으로 불러냈다는 표시다.무당이 몽환의 세계에 들어가 있는 동안 영은 무당의 입을 빌려 그 자리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한다.즉 영은 무슨 제물을 바쳐야 병이 나을 것인가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이다.돼지.닭.소 등등 .
무당이 혼수상태에서 잠이 들면 그의 영이 그의 거처로 되돌아간 것이다.리수족 무당은 마을 사람이 몹시 아플 경우에는 초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냄비나 솥에 돼지기름을 부어 끓이는 동안무당은 몽환의 세계로 들어간다.잠시후 무당은 갑 자기 벌떡 일어나 뜨거운 돼지기름을 자기의 입속으로 퍼붓는다.그리고 전지 불빛을 향해,혹은 손에 든 횃불에 대고 기름을 훅훅 뿜어낸다.
갑자기 큰 불똥들이 무당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온다.그리고 그불똥들은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 다닌 다.컴컴한 방안에서 마치 환상의 세계처럼 놀랄만한 광경이 벌어지는 것이다.무당은 천천히일어나 문가로 다가가 돼지기름 불똥들을 문밖으로 내보낸다.
***무 당굿을 보고 추장집으로 돌아와 막 잠자리에 들려는데어디선가 밤의 적막을 깨뜨리며 들려오는 음률이 있었다.삼라만상이 휴식속에 잠들어 있는 산꼭대기의 외딴 마을에서 심금을 울리는 악기소리를 듣고 있자니 공연히 마음이 심란해진다.드디이 金대원이 못참겠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구,애간장 다 녹이네.』 다른 대원들도 모두들 약속이나한듯 따라 나선다.추장집 너른 뜨락 한 모퉁이에서 교교히 비치는 푸른 달빛을 받으며 한 리수 여인이 향비파를 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월하(月下)의 선녀는 다름아닌 곱상하게 생긴 추장의 막내딸 .그렇지 않아도 며칠동안 金대원이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어 다른 대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뛰어난 미녀.
아마 그녀도 한국에서 온 청년들과 며칠씩 한집에서 지내다보니 마음이 심란했나보다.
뜻밖의 선경에 잠이 달아난 탐사대원들은 수줍어 하는 월하의 미인에게 간청해 비파의 고운 선율에 일부러 취해버린다.
「이 세상 어디엔가는 꿈과 같은 현실이 정말로 존재하는구나!」모두의 얼굴에는 이렇게 씌어있는듯 했다.
마음 같아서는 리수족 마을에서 며칠간 더 머무르고 싶었다.그러나 아직도 갈길이 바쁘다.애초의 탐사목표 아시아 5만㎞에서 겨우 1만5천㎞ 남짓밖에 탐사하지 못한 것이다.결국 다음날 아침 탐사팀은 동구밖까지 따라나오는 추장과 마을 사 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하늘 아래 첫동네에서 인간들이 복작거리며 사는 평지로 내려왔다.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며칠간 리수족 마을에 머물렀던 것이 마치 동화의 나라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아득하게만느껴졌다.
미니버스는 이런 탐사대원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끝없이 북으로만 달린다.도이창산 봉우리가 차창 너머로 가물 가물 사라져갔다.
글.사진=김병호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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