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렬 소수’ 없는 날, 폭력시위도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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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30일 0시 서울 종로 보신각 앞 도로. 시위대 1500여 명이 수시간째 왕복 8차로를 점거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래를 부르거나 구호를 외칠 뿐 ‘투쟁’을 선동하는 단체가 눈에 띄지 않았다. 가끔 전경 앞에서 삿대질과 욕설을 하는 이도 있었지만 다른 시위대의 제지로 곧 멈췄다.

0시30분 방패를 든 전경들이 시위대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폭력 경찰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럼에도 몸싸움을 벌이거나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저항하지 않았다. 10여 분 만에 시위대는 별 마찰 없이 인도로 올라섰다.

지난달 29일 저녁부터 30일 새벽까지 이어진 거리시위는 이전의 시위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경찰의 원천 봉쇄로 서울광장을 잃은 시위대는 종로·을지로 일대를 오갔다. 이날 집회엔 무대차도 방송차량도 경찰에 견인된 상태였다. 체포 영장이 발부된 때문인지 주최 측 관계자도 눈에 띄지 않았다. 집결지를 찾아 움직이는 동안 시위대는 도로 점거 여부를 놓고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100여 명의 소규모 인원으로도 차량이 가득한 태평로·세종로를 ‘손쉽게’ 장악하던 이전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이런 시위 현상과 관련, 경찰 관계자는 “대열 선두에서 폭력을 선동하는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시위용품을 미리 챙기고 통일된 행동을 하는 ‘준비된 소수’가 나타나면 시위가 격화되곤 한다”는 설명이다.

실제 부상자가 400명을 넘길 정도로 ‘시가전’ 양상을 보인 28, 29일 시위에선 물안경을 쓴 20여 명이 경찰차벽 앞에서 폭력시위를 주도했다. 추가 협상 결과가 발표된 21일엔 주최 측과 일부 참가자가 트럭을 동원해 모래를 쌓았다. 시위대의 ‘토성’과 경찰의 버스 차단벽에선 부상자가 속출했다. 쇠파이프가 처음 등장한 6월 8일 역시 참가자 10여 명이 인근 공사장에 침입해 쇠파이프·각목을 가져와 폭력시위를 선동했다.

서울경찰청은 이날 오전 6시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건물 1층의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사무실을 압수 수색했다. 경찰은 컴퓨터 3대와 피켓·모래주머니·깃발 등 시위용품을 확보했다. 또 대책회의의 핵심 단체로 꼽히는 진보연대에 대한 압수 수색도 실시됐다. 이 과정에서 촛불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8명 중 한 명인 황순원(32) 민주인권국장이 붙잡혔다. 대책회의와 진보연대는 “우리를 불법 단체로 규정하려는 치졸한 음모”라고 비난했다.

이날 오후 6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시국미사를 열었다. 시국미사는 촛불집회로 이어졌다. 경찰 관계자는 “종교 행사인 점을 감안해 원천 봉쇄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천인성·강기헌·김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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