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초짜리 휴대전화 녹취 ‘결정적 단서’ 찾았다!

중앙일보

입력

월간중앙■녹음 기록 물증 확보… “딸 서씨 청부살해 추정 음성 분석 중”
■경찰 조사에서 서씨 청부 혐의 부인… “더 이상 할 말 없다”
■박씨 화장 후 유골 수목장 안치… “용의자 공직 출신 큰딸”
■유산 노린 패륜 가능성에 무게… “사후 7일 만에 서씨 재산 상속”

270억 원대 재력가 박모 씨가 필리핀에서 피살된 지 70일. 미궁 속을 헤매던 사건의 실마리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단서는 청부살해 내용이 담긴 59초 분량의 휴대전화 녹음 기록. 대체 누가 박씨를 청부살해한 것일까?


필리핀에서 발생한 60대 한인 여성 재력가 피살사건의 ‘결정적 단서’가 포착됐다. 경찰이 그 동안 초점을 맞춰 왔던 ‘청부살해’ 혐의에 대한 열쇠다. 다음은 흐릿한 녹음 기록 속의 내용이다.

“Your brother’s friend, did a perfect job, she’s gone(당신 형제의 친구가 일을 완벽히 해내서 그녀가 가면”과 “So you can keep the money(그러면 당신이 그 돈을 가질 수 있다)….”

경찰에 따르면 이는 필리핀에서 숨진 박모(67) 씨의 딸 서모(40) 씨가 현지 가이드이자 운전기사였던 한 사내에게 어머니 살해를 청부한 것으로 추정되는 59초 분량의 녹취 내용이다.

이 녹음 기록 안에는 남녀 각각 한 명이 등장해 영어로 대화했고, 특히 서씨의 음성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주로 이야기하고 남성은 짧게 대답했다.

사건 발생 2개월이 넘도록 수사에 난항을 겪는 시점에서 경찰이 포착한 이 녹음 기록의 출처는 어디일까? 이 사건을 맡은 서울 서초경찰서 관계자는 “최근 필리핀 현지 경찰로부터 수사자료와 휴대전화 녹음기록을 복사한 CD 한 장을 넘겨받았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박씨와 서씨의 운전기사였던 필리핀 현지 가이드가 필리핀 경찰 조사에 참고인 신분으로 나와 직접 진술한 내용이며,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물증으로 휴대전화 녹음 파일을 제출했다는 것이다.

경찰에 소환된 가이드는 “서씨와 대화한 것을 몰래 휴대전화에 녹음한 것”이라며 “서씨가 자신의 어머니를 죽여야 하니 살인청부업자를 소개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필리핀 경찰이 추정하는 대로 과연 용의선상에 오른 서씨가 어머니 박씨를 청부살해한 것일까?

서초경찰서는 “휴대전화 녹음기록이 흐릿하고 자주 끊겨 CD의 음질만으로는 정확한 내용을 확인하기 어렵고, 현재까지 녹음 속 인물이 서씨인지 정확히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피의자로 단정할 수 없다”며 “음성 녹음기록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 정밀 분석을 의뢰했다”고 밝혔다.

서씨는 이 녹취 내용에 대해 완강히 부인하면서 현재는 아예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녹음 파일이 담긴 CD를 넘겨 받으면서 답보 상태이던 경찰의 사건 수사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특히 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현지 가이드의 진술이 확보돼 용의자인 딸 서씨의 사건 당일 행적 파악이 한층 수월해질 전망이다.

경찰에 따르면 가이드는 자신에게 어머니 살해를 청부하는 서씨의 육성을 자신의 휴대전화로 녹음해 보관해오다 최근 필리핀 현지 경찰에 소환돼 조사받는 과정에서 이 녹음 파일의 존재를 털어놓은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 조사 결과 가이드는 “딸 서씨가 어머니 박씨를 죽여야 하니 형을 통해 살인청부업자를 소개해 달라고 요구했다”며 “그래서 내가 중간에서 친형을 통해 서씨에게 살인청부업자를 연결해줬다”고 진술했다는 것.

범행 녹취 확보, 수사 ‘급물살’

이어 “서씨가 살인을 청부한 사실을 말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나 자신을 비롯해 우리 가족까지 보복당할 것 같아 말하지 않고 있었다”며 “나와 내 가족의 신변을 보호해 달라”고 경찰에 요청한 사실도 확인됐다.

이번 청부살해의 중간 소개 역할을 한 가이드는 최근 1년 동안 숨진 박씨와 딸 서씨가 필리핀을 방문할 때마다 현지 안내를 맡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 가이드는 사건 당일 행적을 묻자 “박씨가 살해되던 때는 집안에 일이 생겼다고 하고 맡지 않았다”고 말한 것으로 드러났다.

서초경찰서 관계자는 이에 대해 필리핀인들의 습성상 건강문제 등 도저히 일할 수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들어온 일거리를 거절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을 감안해 “석연찮은 이유로 의뢰받은 일을 거절했다는 가이드의 진술은 신뢰할 수 없어서 곧바로 필리핀 현지 경찰에 공조수사를 의뢰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당초 살해 동기를 두 가지 경우의 수로 압축하고 수사 방향을 넓게 잡았다. 필리핀 현지인이 관광객들의 금품을 노리고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거나,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한 살인일 것이라고 예측한 것.

그러나 경찰은 곧 서씨의 청부살해에 무게를 두고 수사력을 집중했다. 왜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잠시 이번 사건이 발생한 70여 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지난 4월3일 오후 8시30분 필리핀 바탕가스 주에서 두 발의 총성이 울린 후 박씨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박씨가 딸 서씨와 함께 어학연수(영어교육)를 위해 3월30일 필리핀으로 출국한 지 사흘 만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중앙일보>가 단독입수해 지난 5월1일자로 보도한 ‘필리핀 경찰 수사자료’에 따르면 사건 당일 박씨는 딸 서씨와 마닐라 소재 한 쇼핑몰에 들른 뒤 샌 후안(San Juan)의 오티가스에 있는 한 콘도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S호텔 앞에서 헤어졌다.

서씨는 경찰에 “어머니가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서 사건 당일 오후 6시께 마닐라의 S호텔에 내려주고,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나기 위해 헤어졌다”고 진술했다.

이후 박씨는 실종됐고, S호텔에서 남쪽으로 110㎞ 떨어진 바탕가스 주에서 사체로 발견됐다. 따라서 이는 박씨가 S호텔 인근에서 누군가에게 납치된 후 바탕가스 주로 끌려가 살해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그림 참조>

문제는 사체의 머리 부분에서 확인된 두 군데의 총상에서 출발한다. 필리핀 경찰은 박씨의 사체에 45구경 권총의 실탄 두 발을 맞은 자국이 있었고, 한 발은 사살용이고 나머지 한 발은 확인사살용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계획된 살해의 흔적은 이것 말고도 또 있었다. 박씨가 갖고 있던 종이가방에 필리핀 돈 5만1,700페소, 120만 원 정도의 현찰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필리핀 경찰은 관광객들의 금품을 노리고 현지인이 저지른 우발적 범행이었다면 현금이 고스란히 남아있을 리 없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경찰은 서씨가 박씨가 살해되던 날 200만 원을 현지에서 환전한 사실에도 주목하고 있다. 100만 원은 서씨가, 나머지 100만 원은 또 다른 가이드가 바꾼 것으로 확인됐다. 청부살해 비용으로 썼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경찰의 입장이다.

유산 노린 ‘패륜 범죄’ 일까?

이에 따라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범행일 수 있다는 판단에 무게를 싣고 있는 경찰은 ‘청부살인’을 확신하고 가이드의 소개로 직접 박씨를 살해한 범인을 찾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범인은 무엇을 노리고 박씨를 살해한 것일까? 수백억 원대에 이르는 박씨의 재산 취득을 범행 동기로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경찰에 따르면 숨진 박씨는 270억 원대의 재력가다.

그는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노점상으로 번 돈을 부동산에 투자해 재산을 모았고, 그 재산으로 투자이민을 고려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는 딸 서씨와 함께 영어수업을 받기 위해 지난 3월30일 필리핀으로 출국한 것이었다.

두 모녀는 한 달간 필리핀에 체류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출국에 앞서 납득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느닷없이 박씨의 유서 내용이 바뀐 것. 박씨의 남동생은 “당초 누나의 유언장에는 유산 상속인이 ‘남동생과 외손녀’로 명기돼 있었는데, 필리핀 출국 전 ‘두 딸’로 바뀐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고 밝혔다.

이 내용은 국내 언론에 보도되기 전 필리핀 신문 <더 필리핀 스타(the philippine star)>에 자세하게 보도된 바 있다. ‘한국 여성 모친 살해 지명수배(Korean woman wanted for killing mom)’라는 제목의 보도 내용을 인용해 보자.

“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로 한 한국 여성이 지명수배 중이다. 용의자인 숨진 박씨의 딸 서씨는 그의 어머니를 화장하자마자 곧바로 한국으로 달아났다. (중략)

‘쇼핑몰에 설치된 CCTV를 포함해 살해된 박씨 가족의 운전기사와 친척 및 두 딸, 그리고 박씨가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필리핀으로 온 별거 중인 남편 등의 진술과 증거를 토대로 우리는(경찰은) 박씨와 필리핀에 함께 온 서씨에게 강력한 혐의를 두고 있다’고 필리핀 4A지역(Region 4A) 수사책임자인 크리스토퍼 랙사(Christopher Laxa) 서장이 밝혔다. (중략)

박씨 사건을 맡은 수사팀 아치 맥칼라(Archie Macala) 형사는 ‘현재 박씨의 딸 서씨를 범인으로 구속할 영장을 준비하고 있으며, 서씨를 구속하기에 충분한 증거자료를 이미 확보했다’고 말했다. (중략)

맥칼라 형사는 중간수사발표에서 ‘살해된 박씨는 여러 군데의 부동산과 사업장, 그리고 국외투자 등을 보유하고 있으며, 박씨의 유서가 최근 수정된 사실을 알아냈다’고 말했다. (중략)

주변 사람들은 ‘총소리가 두 번 나는 것을 들었으며, 흰색 미니버스가 범행 현장을 떠나는 것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박씨의 재산을 둘러싼 가족 간의 불화설도 보도 내용에 포함됐다. 이 신문은 “박씨는 가족들과 소송으로 인해 평탄치 않게 생활해 왔다”고 보도했다. 랙사 서장은 이 같은 사실을 고려해 “용의자인 딸 서씨가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하고 사전 계획에 따라 어머니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짙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경찰이 숨진 박씨의 딸 서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는 이유는 박씨 사후에 일어난 일련의 과정에서 힘을 얻는다.

경찰은 “가족들이 안치돼 있는 경기도 벽제의 한 사찰에 모시자”고 권유한 친지들의 제안에도 서씨가 화장을 요구해 박씨 사후 6일 만인 지난 4월9일 인천시 강화군 전등사 인근 수목장에 유골이 안치됐고, 그 이튿날 박씨의 유산이 서씨에게 상속된 점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서씨는 유명 대학 행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에도 5년여 근무한 것으로 전해졌다.

때문에 지난달 10일 숨진 박씨의 남동생은 이 내용을 토대로 “누나의 죽음과 관련해 딸의 행적이 의심된다”며 “누나의 유언장도 딸에게 유리하게 변경됐다”는 내용으로 박씨 타살과 관련한 진정서를 서초경찰서에 접수했다.

이번 사건을 수사 중인 서초경찰서는 딸 서씨가 필리핀에서 사용한 휴대전화 통화 내역과 가족들의 계좌를 추적하는 한편 박씨의 두 딸과 서초경찰서에 진정서를 접수한 박씨의 남동생 등 관련자들을 출국금지 조치했다.

경찰청 외사수사과도 지난 6월1일 필리핀 바탕가스 주가 수사지역으로 편제돼 있는 현지 경찰과 공조수사에 착수했다.

용의자 서씨 혐의 부인

그러나 현재까지 관련자 조사에서 가이드를 제외하고는 뚜렷한 진술을 받아내지 못하고 있다.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서씨는 경찰 조사에서 “필리핀 경찰이 조사가 끝났으니 귀국해도 된다고 해서 귀국한 것이고, 현지 경찰의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억울하다”며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살해 현장에서 흰색 미니버스를 봤다는 목격자의 진술, 사건 후 사체를 부검 없이 화장하고 간이 장례식을 치른 뒤 입국한 점, 가이드로부터 받아낸 녹음 내용의 사실 여부 확인 등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다”며 이번 사건과 무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서초경찰서 관계자는 “출국한 날부터 사건 당일까지 행적에 대해 서씨의 말과 가이드의 말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고, 말이 일관되지 않는다”며 서씨의 진술에서 앞뒤 상황이 맞지 않는 부분에 집중해 사건 당일의 행적을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필리핀 경찰 주재관을 통해 필리핀 경찰에 현지 관련자 조사자료와 피살자가 마지막으로 들렀던 마닐라 S호텔 폐쇄회로TV(CCTV) 녹화자료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를 검토한 필리핀 경찰 관계자는 S호텔 CCTV에서 박씨와 동행한 딸의 모습은 확인되지 않는다고 전해 왔다.

서초경찰서는 이에 따라 필리핀 경찰이 보내온 녹음 기록과 서씨가 가이드에게 청부살인을 의뢰하며 건넸다는 어머니의 사진, 서씨와 청부살인을 공모한 가이드의 형을 조사한 녹화기록을 토대로 확대수사를 벌이기로 했다. 또 숨진 박씨의 가족 등 주변 인물들의 음성을 확보해 일제히 분석할 방침이다.

오흥택 월간중앙 기자 hto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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