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마을/공주병] 잊고싶은 선팅 유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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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친구를 만난 지 200일이 되어 가네요. 처음 그를 만날 때는 나의 공주병이 극에 달했을 때였죠. 외출하기 전엔 이 옷 저 옷을 이리저리 매치해 보고, 다녀와선 내일은 어떻게 입을까 고민하고, 패션잡지를 끼고 살았지요. 지난해 중국에서 어학연수 할 때는 기숙사 룸메이트 언니가 화장을 안 하면 외출을 꺼리는 나를 보며 “네가 무슨 연예인이냐?” 하데요. 하나가 더 있지요. 시도 때도 없이 거울 보기랍니다. 남자친구가 ‘거울공주’라고 놀리더군요. 나는 여자가 그 정도로 신경 쓰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그러다가 정말 창피해서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 일어났답니다.

한강 둔치에서 데이트 하던 날이었어요. 날이 날인 만큼 화사한 옷을 입고 화장에도 신경을 썼죠. 그런 날은 거울을 더 자주 보게 되는데 그날따라 허겁지겁 나오느라 손거울을 깜빡했답니다. 그럴 때면 임시방편으로 이용하는 쇼윈도 유리, 교통사고 방지용 볼록거울도 강가인지라 없더군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파우더팩트의 거울은 흐려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휴대전화는 거울이 너무 작아 답답했지요. 두리번거리며 거울 대체용품을 찾는데 고맙게도 저쪽에 까만 차 하나가 떡 하니 서 있지 뭐예요. 선팅까지 깔끔하게 했더군요.

화장실 다녀온다고 남자친구한테 말하고는 차쪽으로 갔지요.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며 화장을 손보고, 머리를 매만지고, 옷 매무시도 살짝 고쳤죠. 아직 그를 만난 지 얼마 안 됐던 때라 더 그랬던 것 같네요. 한참을 그러고는 남자친구가 기다리는 매점으로 갔답니다. 그때 매점의 의자에서 어떤 여자가 한창 통화를 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지나가며 그녀의 말을 듣고 쓰러질 뻔했습니다.

“진짜야. 아까 어떤 여자가 우리 차에다 대고 화장을 고치는데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완전 웃겨 진짜. 그런데 오빠랑 같이 있어서 민망해 웃지도 못하고 정말….”

그 뒷말은 들리지도 않더군요. 하늘이 노래졌습니다. 차의 선팅이 진해 안에 사람이 있는 걸 내가 보지 못했던 거지요. 차 안의 두 사람은 나의 모습을 처음부터 다 구경했던 겁니다. 너무너무 창피했습니다. 그 여자가 나를 알아볼까 봐 고개를 숙이고 얼른 남자친구를 끌고 자리를 떴습니다. 그 뒤로는 자동차나 쇼윈도를 거울로 이용하는 일도, 손거울을 놓고 다니는 일도 없답니다.

김초롱 (22·대학생·충북 옥천군 옥천읍 마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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