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변화하는여성>2.영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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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여왕이 존재하는 나라.몇년전까지도 가장 강력한 여성 총리가 다스리던 나라.전세계 매스컴의 최고 인기인물인 왕세자비가 있는나라. 이같은 몇몇 「스타」의 화려함 뒤에서 런던의 보통 여성들은 「자기 앞길은 스스로 개척하라」는 현 보수당 정권의 DIY(Do It Yourself)여성정책처럼 묵묵히,그러나 저력있게 「전통과 보수」의 영국사회를 변화시키며 살아가고 있었다.
1년짜리 유급 산후휴가 등 노르웨이 같은 「환상적인 제도」의뒷받침 없이도 전체 노동력의 절반 가까운(45%)비중을 차지하며 남성들과 함께 사회를 이끌어가는 이들에게선 강인한 생활력 같은 것이 물씬 풍겨났다.
『취미요? 워킹과 쿠킹이지요.』 런던의 신세대 여성 알리시아윌슨(24).1년전 뉴캐슬대 법학과를 나와 현재 경제잡지사에서경제관련 회의나 모임을 기획하는 프로그램 리서처로 일한다.부모곁을 떠나 남자친구 둘,여자친구 하나와 함께 방4개짜리 플랫(flat:영국식 공동자취공간)에서 생활하는 그는 햇병아리 사회인답게 우선은 커리어우먼으로 입신(立身)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 『어릴 때부터 대처총리를 보면서 자란 덕분인지 우리 세대는 전통적인 남자직종에 진출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요즘은 금융계나 법조계.매스컴 분야가 여성의 최고 인기직종으로 꼽히죠.』 결혼에 대한 생각은 긍정적.하지만 아이는 35세 이후에나 가질 생각이다.아이와 일을 병행하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또 아이란 존재는 엄마의 전적인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알리시아같은 신세대에게 남녀가 집안일을 나누는 것은 남녀가 함께 바깥일을 하고 소득을 올려야 하는 것 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다.혹 나중에 남편이 가사노동 분담에 반항(?)이라도 하면 어찌하겠느냐고 묻자 『그런 공룡같은 남자들은 지구 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당찬 대답을 들려준다.
런던의 전통적 법조타운인 템플지역에서 가족문제 전문변호사로 일하는 케이 호키아드(35).28명의 변호사가 합동으로 운영하는 법률사무실 「원가든 코트」의 일원인 중견 여성법조인이다.
『영국 사회는 아직도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부분이 많지요.그만큼 여성이 살기에는 힘이 든다고나 할까요.법조계 역시 마찬가지구요.하지만 높아지는 여성교육에 힘입어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가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가 일하는 법조쪽의 여성 비율은 21%(94년 현재).특히 이혼등가족문제를 전담하는 변호사는 전체의 3분의2 가량이 여성이라고 한다.
영국 정부의 최근 통계에 따르면 의사의 31%,치과의사의 25%,수의사의 25%가 여성이다.약사(43%).교사(68%).
간호사(92%)등 전통적인 여성직종은 물론 회계사(10%).측량기사(9%).건축가(6%)등 이 분야에서 활약하 는 여성들도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이렇게 남성들이 독점해오던 직업군에 진출하는 것이야말로 최근영국사회의 엘리트 여성들이 지향하는 가장 뚜렷한 「삶의 양식(樣式)」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부모가 인도인인 니나 파텔(40)는 영국의 유명한 금융보험그룹인 리걸& 제너 럴에서 부장 자리에 오른 맹렬 직장여성이다.가무잡잡한 피부에 분명한 이목구비의 그는 『우리 회사 7,000명 종업원중 부장급은 500명,500명의 부장중 여성은 5명』이라며 기업이라는 보수적인 집단에서 여성이 고위직에 오르기란 여전 히 힘든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 회사만 해도 여성부장 5명중 4명은 기혼이지만 아이가 없고,나는 미혼』이라는 파텔의 말은 영국의 고위 전문직 여성들이 직업적 성공을 위해 아이키우는 평범한 여성의 행복을 포기하는 추세임을 잘 드러내준다.
33세의 마리아 민닥은 치과의사 출신의 병원경영 컨설턴트.『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남편』이라고 말할 정도로 가정적인 편이지만 그 역시 일에 쫓겨 아직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있다. 『30대 후반에 아이낳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는 것 같아요.부모와 아이의 연령차이가 점점 커지는 거지요.』 ***가족친화적 정책 채택 그러나 역시 대부분의 영국여성은 아직도 자녀가 둘 정도 있는 전통적인 가정의 풍경을 선호한다.직업도 포기하지 않는다.이런 여성들의 선택은 파트타임직이나 자유계약제가 압도적이다.
영국 최대의 생활용품 체인점인 부츠에는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는 시간인 오후2시30분까지만 일하는 엄마판매원들이 많다.대부분 미혼시절부터 부츠에서 일해온 이들에게는 풀타임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휴가.병가.직원할인카드.이익배당 보너스 등의 혜택이 주어진다.기업쪽에서 보면 훈련된 직원들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쓸 수 있어 종업원 훈련비용을 절약하게 되는 셈이다.
영국의 많은 기업들이 채택중인 이같은 가족친화적(familyfriendly)정책 덕분에 이 나라의 남녀 취업률은 70년대이후 계속 그 격차가 줄어들고 있다.남성 취업률은 79년 91%에서 93년 86%로 줄어든 반면 여성취업■ 은 79년 64%에서 93년 71%로 늘어났다.
이미 오래전부터 영국에서 진행중인 1,2차 산업에서 서비스 산업으로의 산업구조 개편도 여성의 취업률을 높이는 한 원인이 되고 있다.
***세계최고의 離婚 국가 이에 따라 지방도시에 가면 광부인남편은 실직하고 대신 아내가 전자회사 종업원으로 취업해 역할이바뀌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고 한다.이런 상황은 영국을 세계 최고의 이혼국가(10쌍중 4쌍)로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남편이 실직하면서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지요.결국 이혼하고 열살짜리 아들을 혼자 키우고 있어요.아이는 친정어머니가 봐줍니다.정부 보조금요? 무직인 엄마에게만 월40파운드가 나오니까 저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템플지역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경리로 일하는 이혼녀 아니타 조네스(41)의 말에서 산업혁명이후 자본주의의 모든 고민을 가장 먼저 경험한다는 선진국 영국사회의 작은 아픔을 엿보는 것같았다.
런던=이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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