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Review] 고미술의 ‘숨겨진 마음’ 읽으려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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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철채상감 시문통형병(靑瓷鐵彩象嵌詩文筒形甁), 고려 12세기, 높이 30㎝, 일본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 소장. 술병에 행초서로 해독(解毒)과 권주(勸酒)의 글이 고려의 서체로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홀로 나귀 타고 미술숲을 거닐다
이원복 지음, 이가서,434쪽, 1만9800원

나귀를 타고 문 밖을 나서면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곳은 도처에 널렸다. 이렇게 32년을 하루같이 저자는 우리미술 7000년 역사현장을 주유했다. 고고미술·벽화·도자·회화·공예·불상…. 말 그대로 박물(博物)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만큼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전체에 대한 통찰’이라 할 것이다. 통찰의 깊이와 유기성에 대한 우려를 저자는 미술사와 미학의 토대 위에 매 페이지마다 발로 찾아낸 유물로 해소하고 있다.

저자의 그림 읽는 법 또한 박물학적 관심과 실천, 체험과 이론이 녹아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유물을 가장 먼저 지금 나를 통해 읽어낸다. 신윤복의 ‘낟알 고르기’를 자기 어머니의 알뜰살뜰한 살림이야기로 풀어내는 식이다. 또 책은 다종 다기한 유물들의 특질을 하나의 키워드로 추출했다. 까치는 기쁨, 묵포도는 바람, 생불(生佛)은 영원한 삶…. 이를 통해 ‘한국미’ 하면 ‘비애’라고 하는 기존의 획일적 미학기준을 실증적으로 거부했다. 그래서 이 책은 유물의 숨겨진 마음을 가장 잘 읽어낸 왕고참 큐레이터의 현장 체험보고서이기도 하다.

책은 차라리 유물과 나누는 사랑의 밀어이자 친절한 소아과 의사선생님의 소견서 같다. 따라서 박물관 하면 으레 연상되는 무겁고 고리타분함은 찾기 힘들다. 꼭 책의 순서대로 따라갈 필요도 없다. 예컨대 제3부 ‘표암전시’를 보다가 제2부 ‘꿈의 정원’에서 국화향기를 음미해도 좋다. 엄선한 도판은 실물의 감흥을 그대로 담았고, 꼼꼼하게 정성을 들인 장정은 저자를 똑 닮았다. 여행길에 저자의 이야기가 다 끝나면 나귀에서 내려도 좋다.

박물관은 유물의 역사지만 사람의 역사이기도 하다. 저자는 100년이 채 안 된 우리 박물관 역사에서 고유섭·전형필·최순우 같은 분들의 가르침이 아니었으면 지금 본인의 통찰력 또한 불가능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책 속 고려자기엔 아래와 같은 권주가가 적혀 있다. ‘술은 데워야 독이 없고(酒爲溫無毒) / 차는 식으면 향이 사라지네(茶因冷不香) / 이 술 안 마실 수 없으니(此酒不可不飮) / 가인 재자 잠깐 만나네(佳人才子刹逢).’

32년 숙성의 따뜻한 술을 저자가 방금 내왔다. 어찌 마시지 않겠는가.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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