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작기행>찰스 라이히著 "이 體制를 고발한다"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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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그의 고발은 또한 시민의 생활권을 지키자는 것이다.마약.폭력.결손가정.환경파괴등 미국사회가 시달려온 문제의 원인을 당사자들의 개별.도덕적 문제에서 찾기보다 체제가 빚어낸 전반적 조건에서 찾아야 한다고 라이히는 주장한다.인간적인 문 제들을 고려하지 않는,시장원리와 경제논리만을 내세우는 체제의 운용이 그 구성원과 소외된 자들 모두에게 불안감과 분노를 심어주는데 문제의 근본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경제란 무엇인가』라고 라이히는 묻는다.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나오고 미국 헌법이 작성된 18세기말까지 경제는 인간의모든 활동 속에 분화되지 않은 채 녹아 있었다.그러나 지금은 환경.자유.성취감등 인간의 본질적인 제(諸)가치 와 유리된,고삐풀린 경제논리가 끝모를 파국으로 사회를 끌어 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우리의 위치를 밝히는 지도(地圖)를 새로 만들자고 그는 청한다.경제의 힘을 장악한 자들이 그동안 학계.언론계.관계.정치계에 대한 영향력을 총동원해 국민들에게 만들어 보여준 지도는 미국사회를 함정으로 이끌어 왔다.이제 미국의 건국정 신,그리고 인간성에 대한 이해에 입각해 현실을 다시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위치를 되찾자.그리고 새로운 지도가 보여준 방향에 따라 미래의청사진을 그리자.이것이 라이히의 주장이다.
미국사회의 전통적 이념인 자유시장과 민주주의는 이제 환상과 그림자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라이히는 새 지도에 적어 넣는다.소수의 탈락자를 제외한 사회 전체의 승리를 구가하는 후쿠야마와 달리 그는 소수의 권력자를 제외한 사회 전체의 패 배를 탄식한다. 소수의 탈락자도 소수의 권력자도 아닌 중간층이 지금의 상태를 승리의 상태로 보느냐,패배의 상태로 보느냐에 따라 후쿠야마와 라이히,어느 쪽에 귀기울일지 정해질 것이다.
라이히는 후쿠야마의 「탈 역사」와 달리 「탈경제」(Post-Economy)시대의 청사진을 그린다.허구적인 시장원리와 경제논리를 배격하고 민주주의와 박애정신으로 움직여지는 새 체제를 만들자는 것이다.사회를 지배하는 대기업의 힘을 직 시해 사기업이 아닌 공기업으로서의 성격을 밝히고,인간생활을 지배하는 경제의 힘을 직시해,경제논리의 폭을 넓힐(환경파괴.범죄증가.근로자의 불만감등 사회와 시민의 모든 손해를 원가에 포함시킬)것을 그는 제안한다.그렇게 함으로써 기업의 사회에 대한 책임을 규정하고 시민들을 「번영 속의 비극」으로부터 건져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미국 지성계의 진보주의가 어떤 무력감에 빠져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그러나 5년 전에 비해 자유민주주의의 승리에 대한 미국인들의믿음에 금이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1776~1990.그 앞도 없고 그 뒤도 없는 역사.미국인들이 후쿠야마의 꿈에서 깨어나며 던지는 비판의 목소리는,그 꿈의 변두리에 서있던 우리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김기협 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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