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예술장르로 자리매김 기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78년 뉴욕 휘트니미술관은 새로운 예술장르 탄생을 알리는 화제의 전시하나를 소개했다.
루마니아출신으로 40년대부터 미국 뉴요커지 표지를 그려온 일러스트레이터 솔 스타인버그의 대 회고전이었다.
현대미술에 관한 한 전위(前衛)를 자처해온 휘트니미술관이었지만 일러스트레이터를 회고전에 초대한 것은 뉴요커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그때까지 일러스트레이션은 잡지나 신문.광고 따위에 곁들여져 소구효과(訴求效果)나 높이는 어정쩡한 보조물이었다. 일러스트레이터들에 대한 시각도 본격 예술가보다는 격이나 고상함에서 훨씬 떨어져 상업작가 대접이 고작이었다.이 전시는 솔스타인버그라는 탁월한 일러스트레이터의 업적에 초점을 맞췄지만 결과적으로 일러스트레이션을 다시 보게 했다.
이를 통해서 일러스트레이션은 회화적 표현성 위에 문학적 상상력,즉 시적 서정과 유머 그리고 문화비평같은 것이 결합된 독자적인 예술장르란 평을 받았다.
일러스트레이션이 이처럼 새로운 에술장르로 대접받은지 20년 가까이 흘렀지만 국내 형편은 여전히 출판이나 광고의 보조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이 기획해 내년 1월5일까지 열고있는『한국일러스트레이션의 언어와 현실』전은 국내 일러스트레이션의 현실을 횡적으로 절단해 보여주는 전시다.늦기는 했지만 일러스트레이션이 국내에서도 회화나 조각같이 독립된 예술 장르로서 자립할수 있는가를 확인하자는게 이 전시에 담긴 기획의도다.
초대작가는 이성표.전갑배.이인수.김환영.곽영권.박불똥.유재수.이철수.강우현씨 등 9명.대부분이 잡지.사보.책표지 등 출판물을 통해 활발한 작업을 펴고 있는 국내의 대표급 일러스트레이션작가들이다.
이성표.전갑배.이인수.곽영권.유재수.강우현씨가 처음부터 시각디자인에서 출발해 일러스트레이션작업을 시작했다면 나머지 세사람의 출발은 회화였다.이철수씨는 판화,그리고 김환영.박불똥씨는 서양화다.불교를 소재로 명상적이면서 문학적 향기가 짙은 작업을보여주는 이철수씨는 진작부터 판화가로 널리 알려진 작가다.또 김환영.박불똥씨는 80년대후반 민중미술운동에 앞장 섰던 작가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일러스트레이션작업을 출판미술운동의 하나로 생각하는데 있다.화랑을 통하지 않고는 거래되지않는 미술의 일반적인 유통구조 대신 출판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해 생산자인 작가와 소비자인 일반인이 직거래하겠다는게 이들의 생각이다 .그래서 이들 작업은 회화적 색채가 강하다.출발은 조금 다르지만 6명 가운데 이인수씨도 추상적인 현대미술의 이미지를 그대로 일러스트레이션작업에 끌어들여 다분히 회화적인 분위기를 내는 작업을펴고 있다.
이성표.곽영권씨는 일러스트레이션의 순발력,예컨대 단순한 선과간결한 색채만으로 위트와 서정을 유감없이 표현해 내는데 충실한작가다.반면 전갑배.유재수씨는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작업으로 사사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 다.어린이 도서의 일러스트레이션작가로 유명한 강우현씨는 그의 주무대가 동화분야인 만큼 동화적 상상력을 처리하는 솜씨가 뛰어나다.
이 전시는 국내 일급 일러스트레이터를 한자리에 모았지만 당초기획한 의도,즉 새로운 예술장르로서 일러스트레이션의 독자성을 보여주기에는 다소 미흡해 보인다.몇몇 작가들의 경우이긴 하지만그것은 출판을 떼어낸 일러스트레이션만으로는 전 달하려는 메시지가 여전히 낯설고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윤철규 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