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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어르신들의 아름다운 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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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가끔 서울 종묘공원에 들르곤 한다. 산책도 할 겸 세상사를 줄줄 읊는 어르신들 얘기도 들어보기 위해서다. 종묘공원은 어르신들의 거대한 직장이다. 수천 명이 매일 그곳으로 출근한다. 하루 종일 바둑·장기 두고, 신문·잡지 읽고, 서로 말동무하는 게 일이다. 물론 술 마시고 싸우거나 노름을 하는 분들도 있다.

며칠 전 만난 칠순의 김만근 할아버지 얘기가 재미있다. “아직 근력은 충분해. 자, 내 팔뚝 좀 봐. 노가다도 할 수 있는데 일이 없어. 그래서 여기 오는 거야. 오전 10시에 왔다가 오후 5시 퇴근해. 난 여기가 직장이지.” 서울 창동에 사는 그의 하루 용돈은 3000원. 노인 우대 무임승차권으로 1호선 창동역에서 종로3가역까지 전철은 공짜로 타고 다닌다. 점심은 공원 인근 밥집에서 2000원짜리 국밥으로 때운다. 담배는 이틀에 한 갑을 사니 하루 3000원이면 족하다는 것이다.

곁말을 듣던 말끔한 콤비 차림의 한 어르신이 끼어든다. 그리고 대뜸 “명박이가 부럽다”고 했다. 그는 “대통령과 1941년생 67세 동갑내기여. 난 일하고 싶어도 노인이라며 받아주는 곳이 없어. 근데 명박이는 5년간 일하라고 국민이 받아줬잖아. 직장 튼튼하겠다, 얼마나 좋겠어”라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종묘공원은 실버사회의 거울이다. 2005년 고령화사회(65세 이상 노인인구가 총인구의 7% 이상)에 진입한 한국은 10년 후인 2018년이면 고령사회(노인인구 14%), 2026년이면 초고령사회(노인인구 20%)가 된다. 지금도 ‘건강한 어르신들’이 넘쳐나는데 앞으론 정말 큰일이다. 남의 일이 아니다.

종묘공원은 사회 현실도 비춰준다.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 효순·미선양 추도집회, 6·15 남북공동선언 문제는 물론 어르신들의 성문제까지…. 별의별 얘기가 다 나온다. 그중 우리가 꼭 귀담아야 할 어르신들의 소망 하나. 바로 ‘일’이다. 힘은 넘치는데 일할 데가 없어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정부는 올해 11만7000개의 노인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한다. 젊은이들도 펑펑 놀고 있는데 “웬 배부른 소리냐” 할지 모르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다. 일을 하면 젊어지고 더 건강해져 사회적 부담이 줄어들고, 후손들도 짐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즐겁게 일하는 어르신들을 보면 안다. 74세의 노동옥 할머니는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만 되면 힘이 난다. 스물둘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 50년 넘게 숙성시킨 김치 담그는 솜씨를 뽐낼 수 있어서다. 할머니는 울산시 울주군에 있는 ‘아삭김치공장’에서 일한다. 3월에 문을 연 이 공장의 직원은 할머니 13명. ‘손맛’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분들이다. 가장 젊은 할머니가 64세, 노 할머니가 왕언니다. 13명이 직접 손으로 정성스레 담근 ‘아삭’ 김치의 한 달 총매출은 800만원, 개인 월급도 20만~50만원에 불과하다. 노 할머니는 “돈이 문제가 아니고 일이 좋을 뿐”이라며 “건강도 좋아지고 자식한테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정부와 울산시가 5000만원씩 내서 세운 김치공장이 할머니들에게 큰 행복을 안긴 것이다.

중앙일보가 6월 3~6일 연재한 ‘은퇴기자 홈커밍 리포트-다시 뛰는 실버’ 4회 시리즈도 좋은 예다. 본지 기자 출신인 60, 70대 대선배 6명이 직접 현장을 뛰며 재취업에 성공한 ‘6070’들을 인터뷰해 작성한 기사였다. 선배 기자나 재취업한 분들 모두 백발이 성성하지만 평생 쌓은 노하우를 살릴 수 있어 즐겁다고 했다.

일하는 어르신들의 ‘손’은 정말 아름답다. 전국의 많은 ‘건강한 어르신들’이 아름다운 손을 갖고 싶어 한다. 청년 일자리를 뺏자는 것도 아니고 큰돈 벌자는 것도 아니다. 정정하니 그저 뭔가 하고 싶다는 것이다. 한국의 오늘을 이끈 손을 더 써보고 싶다는 것이다. 어르신들이 행복해야 사회도 건강해진다. 우리 모두의 일이고 숙제이고 미래다.

양영유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