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프리즘] 일본 또 ‘묻지마 살인’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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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난달 말 두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와 유치원에서 비상연락망이 돌았다. “얼마 전 오사카(大阪)에서 발생한 도오리마(通り魔·거리 습격사건 범인)가 신주쿠(新宿)에 머물고 있다는 제보가 있으니 당분간 보호자가 자녀 등하교 시에 동행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며칠 뒤 범인은 도쿄 인근 사이타마(埼玉)에서 체포됐지만 일본 학부모들은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묻지마 살인’ 사건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는 도쿄의 유명 관광지이자 전자제품 가게가 많은 아키하바라(秋葉原)거리에서 길 가던 시민 7명을 살해하고 10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묻지마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당시 아키하바라 거리를 트럭으로 돌진한 뒤 차에서 내리자마자 행인들에게 살상용 칼을 마구 휘둘렀다. 이 사고로 10대 청소년과 70대 노인 등 총 7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10명이 다쳤다.

범행이 주말 대낮에, 그것도 보행자 전용도로에서 무차별적으로 칼을 휘둘렀다는 점에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더욱이 아키하바라는 외국 관광객들이 쇼핑을 위해 많이 찾는 곳이다.

앞서 3월에는 이바라키(茨城)현 쓰치우라(土浦)시의 한 전철역에서 24세 청년이 같은 범행을 저질러 1명이 숨지고 7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올 들어 ‘묻지마 살인’ 사건은 5건이나 벌어졌다.

과거 10년 동안엔 67건이 발생했다. 연간 평균 6.7번꼴이다. 그래서 전체 강력범죄 발생 수는 줄고 있는데도 일본 국민은 치안상태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범행 동기다. 아키하바라 사건의 범인 가토 도모히로(加藤智大·25)는 경찰 조사에서 “누구를 죽이든 상관없다. 사는 게 지겹다”고 말했다. 다른 사건의 범인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일본 사회는 원인 분석에 분주하다. 공부만 강요한 부모에 대한 불만,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도 애인도 없는 외로움, 하류 인생이라는 패배감,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20대 비정규직의 불안심리 등 일본 젊은이들의 고민을 모두 안고 있던 가토 용의자는 범행 당시 병적 심리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낙오되는 젊은이들의 박탈감, 그에 따른 빈부격차, 무너진 가족애 등이 원인이란 지적도 나온다.

특히 이 중에서도 고독이 최대 원인으로 꼽힌다. 조치(上智)대 후쿠시마 아키라(福島章·범죄심리학) 교수는 “일상적인 불만이나 울분을 토로할 대상이 없는 생활이 지속될 경우 내면에 축적되는 증오나 스트레스가 사회나 가진 자와 같은 불특정 다수를 향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가토 용의자는 대화를 나눌 친구도 가족도 없이 매일 자신의 심경을 휴대전화 인터넷 게시판에 기록했다고 한다. 하루에 수십 건, 많게는 200건까지 자신의 심경을 남겼다.

이 사건 이후 살상용 칼의 생산·판매를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됐고, 인터넷 게시판에 오른 살해 예고 글을 경찰에 신고하는 건수가 급증했다.

집권 자민당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집을 상담원이 방문해 대화를 나눔으로써 소외감과 고독감을 해소하는 영국의 커넥션스 제도를 도입할 계획이다. 자칫 예비범죄인으로 발전할 수 있는 160만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들의 사회 적응을 돕겠다는 시도다.

어린 시절부터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하는 교육 현실, 가족 간 대화가 사라져 가는 가정, 부의 양극화 현상 등으로 계층과 세대 간 골이 깊어지고 있는 한국 사회도 직시해야 할 사건이다.

도쿄=박소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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