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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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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The early bird catches the worm).” 대입 수험생이면 누구나 씨름했을 만큼 유명한 영어 참고서에 나오는 속담이다. 오랫동안 잊고 지낸 이 속담을 되새기게 해 준 건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의 이명박 당선인이었다.

평생을 ‘새벽형 인간’으로 살아온 당선인은 “공무원은 국민의 머슴이므로 국민보다 먼저 일어나 일해야 한다”는 지론을 폈다. “공무원들이 한 시간 일찍 일어나면 국민은 한 시간 편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땐 참으로 신선해 보였다. 국민들은 “비로소 제대로 일하는 대통령을 뽑았구나”며 안도했다. 월화수목금금금,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하겠다는 ‘노 할리데이’ 선언도 있었다.

새 정부 출범 후 많은 사람이 대통령을 좇아 새벽형 인간으로 변신했다. 8시에 시작하는 수석비서관 회의 자료를 챙기느라 직원들은 6시30분이면 벌써 ‘업무삼매경’이다. 출퇴근 시간을 아끼느라 도심에 오피스텔을 따로 구하는 청와대 직원도 늘었다고 한다. 전임 정권 때처럼 연인과의 밀회를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님을 누구도 의심치 않는다. 청와대뿐 아니라 모든 공직사회가 비슷하게 돌아갔다.

부지런한 공무원으로 가득 찬 정부는 얼마나 믿음직한가. 업무 과다로 쌓인 피로가 창의적인 발상을 가로막는다거나 수면부족이 판단력을 흐릴 것이란 지적은 노파심의 발로로 여겨졌다. 인생을 두 배로 사는 아침형 인간들이 만드는 ‘아침형 사회’의 도래는 시대적 요청인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한 청와대 근무자의 푸념은 그런 생각들을 깡그리 수정하라고 재촉한다. “청와대 근무 100일이 넘도록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주말에도 출퇴근 시각이 평일과 다르지 않다. 청와대에서 밤 10시20분에 출발하는 마지막 통근버스를 타는 날은 그나마 일찍 퇴근하는 것이다. 아내와도 제대로 대화할 시간이 없다. 며칠 전 처음으로 저녁 시간에 친척들을 만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했는데, 시중 여론이 이토록 나빠졌는지 미처 몰랐다. 문제는 나뿐 아니라 청와대의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는 데 있다.” 실제로 하루 세 끼 모두 청와대 구내식당에서 해결하는 직원이 많다고 한다.

대통령이 지적한 소통 부재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건 아닌지 따져 볼 일이다. 일에 치이고, 시간에 쫓긴 나머지 국민과의 소통이 뒷전으로 밀려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서두에서 예를 든 참고서에는 이런 영어 속담도 나온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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