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Review] ‘개 호루라기 정치’가 양극화 부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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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억만장자인 빌 게이츠가 어느 날 와바 술집에 들어갔다면 그곳을 찾는 고객의 평균 소득은 크게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빌 게이츠가 왔다고 해서 그 술집의 고객 개개인이 더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통계 수치만 올라갔을 뿐이다. 한 나라의 평균 소득에도 이 같은 허수가 있다. 따라서 경제학자들은 평균 소득보다 현실을 좀 더 많이 반영하는 중앙값을 본다. 중앙값은 구성원을 줄 세워 놓고 그 가운데에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삼는다.

글쓴이인 폴 크루그먼(뉴욕타임스 칼럼리스트·프린스턴대 교수)은 현재의 미국 사회를 이 같이 ‘평균 값’이 아닌 ‘중앙 값’으로 따져 봐야 한다고 했다. 미국이 부자나라이긴 하지만 국민이 골고루 잘 살지는 못한다는 얘기다. 빌 게이츠와 같은 극소수의 억만장자가 과거보다 더 많아져 미국의 평균 소득이 올라갔을 뿐이라고 한다. 불평등·양극화는 되레 심화됐다는 분석이다.

크루그먼은 이 같은 현상이 왜 생겼는지를 찾아 나섰다. 먼저 미국의 경제사를 꼼꼼히 들여다 봤다. 그가 역사를 통해 얻은 결론은 보수주의자들 때문에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됐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글쓴이의 정치적 성향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크루그먼은 부시 정권과 보수주의자를 향한 공격수로 잘 알려진 진보주의자다. 국가경제를 시장에만 맡겨서는 안 되고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케인즈파 옹호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런 사상에서 부시 정권과 보수주의자들을 끊임없이 비판했다. 한마디로 현재의 경제적 불평등 확대는 보수주의자들의 정치력 부재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크루그먼은 정부가 어려운 사람들을 외면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도 보수주의자들은 불평등 해소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라는 요구에 항상 ‘시장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한다고 꼬집었다.

크루그먼은 평소 ‘미래의 이상적인 국가’ 모습을 많이 연구한다. 이 책에서 그가 결론 내린 이상적인 국가는 바로 ‘중산층이 중심이 되는 사회’였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일반적인 생각처럼 경제가 발전하면 저절로 중산층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대신 그는 ‘정치적 행동’을 통해서 이상적인 국가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해법을 제시했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적 행동이란 프랭크린 루즈벨트 정부의 뉴딜정책(경제공황에 대처하기 위해 1933년 시행한 경제부흥정책) 등과 같은 것을 말한다.

하지만 지금의 미국은 이런 정책을 싫어하는 보수주의자(부시)가 정권을 잡고 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 그는 보수주의 쪽에서 진보주의적인 제도를 많이 도입할 것을 주문했다. 보수주자들은 다소 편치 않겠지만 국민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용감하게 사회적 안전망을 넓히고, 불평등을 줄이는 뉴딜정책을 펴라고 했다.

뉴딜정책의 중심사상은 ‘국가는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많이 걷고 사회보장제도나 실업보험제도를 확대하라는 요구다. 정부가 불평등 해소를 위해 돈을 좀 써도 보수주의자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나라 경제는 망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크루그먼의 주장이다.

루즈벨트 대통령 때도 이 같은 정책을 폈지만 보수주의자들이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논리다. 정부가 시장을 간섭하면 할수록 부패가 늘어난다는 것도 루즈벨트의 깨끗했던 정부를 보면 생각이 바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비난한다면 달게 받겠다는 태도다. 50년대 미국 농민들이 ‘농업보조금이 사회주의라면 우리도 사회주의자다’라고 외친 사실을 상기시켰다.

또 1901년 메릴랜드 주에서 노동자가 업무상 재해를 당하면 고용주가 반드시 금전적 보상을 하도록 한 노동자보상법을 통과시켰으나 위헌 판결을 받은 것을 비판했다. 지금도 보수주의자들이 이런 정책들을 막아 중산층과 무산계급의 삶을 팍팍하게 만들고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선진국 중에서 전국민 의료보험제도가 없는 나라는 미국 밖에 없다고 한탄했다. 클린턴 대통령 때 이 제도를 시행하려다 보수주의자들의 반대로 무산 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반면 부시 정부가 ‘개 호루라기 정치’를 한다고 혹평했다. 개 호루라기란 사람에게는 크게 들리지 않지만 개는 잘 들리는 주파수를 내는 것이다. 부시 정부가 가진 자를 위한 정책만 편다고 꼬집었다. 만약 미국의 경제발전과 생산성 향상 혜택이 노동자에게 골고루 나눠졌다면 현재의 개인 소득은 70년대보다 35% 정도 늘었을 것이라고 추산하기도 했다.

크루그먼이 한국인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그가 아시아 금융위기가 오기 일년 전에 이를 정확히 예측했기 때문이다. 예측력과 분석력이 뛰어난 그가 이번에는 미국의 미래를 말했다. 바꿔 말하면 현재 정권을 거머쥔 미국 보수주의의 위기와 해법을 제시한 셈이다. 보수주의자로 정권을 잡은 지 100일을 갓 넘긴 이명박 정부가 고스란히 참고해도 될 만한 책이기도 하다.

김시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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