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추억 … 청와대 불쑥 찾은 이회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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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가 1일 미국산 쇠고기 장관 고시 강행에 항의하는 서한을 박재완 정무수석에게 전달한 후 청와대를 떠나고 있다. [뉴시스]

“독한 소리 좀 해야겠다.”

3일 오후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는 격앙돼 있었다. 정부가 사실상 쇠고기 재협상 방침을 밝힌 이날 이 총재는 “대통령이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거냐”며 이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는 당직자들과 대화하던 중 “더 이상 못 참겠다”며 곧장 청와대로 향했다. 이 총재는 자신을 맞은 박재완 정무수석을 자신의 승합차에 태운 뒤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대통령과 얘기하게만 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면담은 불발됐다.

이 총재는 현충일을 하루 앞둔 5일엔 ‘국민께 드리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재협상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주장에는 변함이 없다”며 “그러나 내일 하루만이라도 촛불집회를 중단하고 호국영령들의 뜻을 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지냈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쇠고기 문제를 어떻게 슬기롭게 풀어야 하는지 대통령부터 정부·여당·야당 그리고 국민 모두가 조용히 생각해 보는 날이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미국산 쇠고기 정국에서 이 총재의 분주한 행보가 화제다. 그는 쇠고기 파문 초반부터 한·미 쇠고기 영문 협정문을 직접 분석하는 등 “검역 주권 확보를 위한 재협상”을 외쳐 왔다. 최근엔 “대통령과 직접 대화하겠다”며 두 차례나 청와대를 불쑥 찾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면담이 이뤄지지 않아 “체면만 구겼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런 이 총재가 요즘 연일 규모가 확대돼 가는 촛불시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주변에 “인터넷 생중계를 보게 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라고 한다. 회의 석상에선 “촛불시위 현장에 가 봐야겠다”는 말도 여러 차례 했다.

이 총재는 2002년 대선에서 촛불의 ‘힘’을 경험했었다.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효순·미선양을 추모하는 촛불이 전국을 뒤덮을 때였다. 촛불시위 바람 속에서 “반미면 어떠냐”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밀려 그는 패배했다. 실제 이 총재는 비공개 회의에서 “2002년에 한나라당 내 소장파의 요구로 촛불시위 현장에 나갔는데 시점을 놓친 측면이 있었다”며 ‘촛불의 추억’을 거론했다고 한다.

그런 그는 쇠고기 정국이 자칫 보수세력 전체의 위기로 번질 것을 염려하고 있다고 한다. 박선영 대변인은 “쇠고기 문제를 하루속히 매듭짓지 못하면 보수세력 전체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답답함에서 대통령을 만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재는 1일에도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다 거절당한 뒤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신의 우려를 이렇게 전했다. “한때 한나라당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10년 만에 정권교체에 막 성공한 보수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보수에 대한 국민적 지지 철회와 좌파의 득세라는 불행한 결과가 오는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정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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