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에세이] 천안문 사태 19돌 …‘그날의 기억’ 증발된 중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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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천안문(天安門) 사태 19주년을 맞은 4일 오전. 베이징(北京) 하늘은 그날의 함성을 전혀 기억하지 않는 듯했다. 인파로 가득 찼던 광장은 조용했다. 8월에 열리는 올림픽을 앞두고 테러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검문검색만 대폭 강화됐다.

광장 북쪽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창안(長安)대로에 자전거 행렬은 사라지고 차량들로 혼잡했다. 시민들은 아우디·도요타·현대차를 몰고 경쟁하듯 바쁘게 길을 재촉했다.

중국 언론들도 침묵했다. 이날 발행된 수십 종의 신문을 뒤져봤지만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6월 4일 수요일’이란 날짜 표시만 앙상하게 인쇄돼 있었을 뿐 천안문 사태를 다룬 기사 한 줄 찾아 볼 수 없었다.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지난달 12일 발생한 쓰촨(四川) 대지진 특집 프로그램은 20여 일째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천안문 민주화 운동의 주도 세력이었던 대학생들은 지금 여름 방학을 앞두고 종강 분위기로 들떠 있다. ‘그날’을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정치 개혁이나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자보 한 장 찾아볼 수 없다.

경제성장의 혜택을 입고 귀하게 자란 ‘바링허우(八零後:1980년 이후) 세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 중국 대학가의 달라진 풍경이다. 이들의 주 관심사는 취업이고 그 다음이 연애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지만 바링허우 세대는 민족주의에 쉽게 열광한다. 중국 정부가 지정한 희생자 애도 행사가 있었던 5월 19일, 바링허우 세대는 천안문 광장으로 대거 몰려갔다. 수만 명의 군중 속에서 이들은 “중국 힘내라(加油中國)” “중화민족 대단결”을 목청껏 외쳤다.

20년 전에 발생한 ‘인재(人災)’ 보다 최근에 발생한 천재(天災)를 통해 바링허우 세대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더 깊게 느낀다. 중국 정부의 애국주의 교육 때문이다.

하루 전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의 인권 문제는 내정인 만큼 외부 세력이 간섭하지 말라”고 선을 그었다. 중국식 민주와 인권 논리를 또다시 반복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사태를 강경 진압한 리펑(李鵬) 전 총리의 아들 리샤오펑(李小鵬)이 산시(山西)성 부성장에 올랐다는 소식이 들렸다. 국유 전력회사인 화넝(華能)의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공식적으로 정계에 입문한 것이다.

리샤오펑의 영전 소식은 천안문 시위에 대한 중국 정부의 입장(반혁명 동란)이 올해도 바뀌지 않을 것으로 시사하는 대목이다. 잘나가는 중국 경제의 힘 때문인가. 현대 중국의 최대 정치적 소용돌이였던 천안문 사태는 아주 잊혀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베이징=장세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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