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좋은 대통령 없었던 건 권력구조 탓 … 개헌운동 나설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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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만난 사람=박승희 정치부문 차장

1979년 10대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뛰어든 지 만 29년. 올해 초 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80년대 말 격동의 시대엔 평민당 원내총무로 고(故) 김윤환 총무(당시 민정당)와 국정의 고리를 푸는 굵직한 협상을 했다. 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곤 DJ(김대중 전 대통령)와 결별, 노무현·김정길 등과 ‘통추’ 활동을 함께 했다. 그 바람에 ‘대통령의 정치 스승’이란 타이틀도 얻었다. 김원기(71·사진) 전 국회의장 얘기다.

지난달 31일 서울 광진구 자양2동 자택으로 찾아가 만난 김 전 의장은 노타이 차림이었다. 김 전 의장은 “한국 정치의 미래를 위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며 “개헌연구단체를 만들어 정계·학계·시민단체와 함께 개헌 운동을 하고 싶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역주의도 대통령 한 사람에게만 권력이 집중되다 보니 생겨난 폐해”라며 “차기 대권주자가 나타나기 전인 18대 국회 전반기, 3년 안에 꼭 개헌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토요일 오전 9시30분부터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 맞는 첫 주말이다. 아쉬움은 없나.

“누구나 나 정도의 단계를 밟은 사람이면 대통령직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대통령으로 나설 수 있는 길과 당선될 수 있는 길은 하늘이 점지하는 것이다. 아쉬움은 없다.”

-15대 총선을 앞두고 DJ와 결별했다. 그 결과 정읍에서 DJ가 미는 국민회의 후보에게 패했는데.

“(DJ가) 당을 새로 만들어 결별하게 됐다. 나는 최일선에서 분당을 반대하고 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 결과 호남에서 내가 당선되면 DJ로선 정치적 타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DJ와 가족들이 모두 출동해 내 당선을 막았다. 그 이전에도 DJ가 나를 오해하는 사건이 있었다. 14대 총선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았는데 DJ와 이희호 여사가 (아들인) 홍일이의 공천을 부탁했다. 하지만 노무현·김정길 등 당내 소장 개혁파가 반대해 무산됐다. 나중에 동교동에 설명했어야 하는데 소홀히 했다. 이런 점들이 DJ와 동교동계를 서운하게 했다.”

-노무현 정부 초반 대북송금 특검을 막아주지 않은 것도 동교동에선 서운해한다.

“솔직히 나도 노 대통령한테 섭섭했다. 새 정부 출발에 상당히 짐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해 청와대에서 만나 특검을 해선 안 된다고 만류했다. 각료회의(국무회의) 전이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해버렸다. 당시 대통령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대통령의 자리를 갖고 청와대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 말을 듣지 않는 것 같다. 그게 대통령제의 문제점이다.”

-노 전 대통령이 쓴소리를 왜 외면했다고 생각하나.

“(곰곰이 생각한 뒤) 노무현 정부에 와서 당정분리를 해 의식적으로 국회나 정당에 대해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에게 막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막료와 정치적으로 분리돼 결국 청와대 비서실과 행정부 안에 대통령이 갇히는 상황이 됐다.”

-왜 개헌을 주장하는가.

“대통령이란 자리는 국민 통합의 상징이어야 하는데 되레 갈등과 대립의 원천이 돼버렸다. 역대 9명의 대통령 중 끝이 좋았던 대통령이 없다. 우연이 아니고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권력구조나 정부 형태는 시대를 풀어가는 하나의 열쇠다. 시대와 안 맞는 열쇠로는 문을 열 수 없다. 이건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구조에 문제가 있다.” (이 말을 한 김 전 의장은 준비해온 자료를 꺼냈다. 원고지 18장에 개헌과 관련한 소신이 조목조목 적혀 있었다)

-미국의 경우 대통령 중심제이지만 갈등 해소 구조가 작동하고 있지 않는가.

“연방제를 택하는 미국의 경우 권력의 많은 부분이 주 정부에 있고, 의회가 큰 힘을 갖고 있다. 예산 편성권을 의회가 갖고 있다. 우리 대통령제는 대통령이란 자리를 차지하면 모든 것을 다 갖고, 대통령이 안 되면 모든 것을 다 잃는 제도다. 그러니 대통령 되는 데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대선을 앞두곤 국회의원들도 전부 줄을 서야 한다. 득표를 위해 지역주의를 이용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란 것도 알게 된다. 결과적으로 지역주의가 굳어지고 대화와 타협, 상생과 포용이 설 자리가 없다.”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이 원 포인트 개헌을 제안했을 때 반대했는데.

“반대했다. 대통령이 직접 개헌을 추진하면 안 된다고 말렸는데 수용되지 않았다. 내 생각엔 당시 노 대통령에게 ‘이렇게 대통령 할 바엔 차라리 임기를 단축하겠다’는 입장도 깔려 있었다고 본다. 개헌을 그렇게 추진해선 성공할 수 없다.”

-17대 국회 전반기(2004~2006년)에 국회의장을 지냈다. 당시 국회에서 개헌을 추진할 순 없었나.

“당시에도 내가 여러 장소에서 개헌을 주장했다. 야당인 한나라당 의원들도 여럿 만났다. 그런데 2004년엔 한나라당의 유력 대권주자인 박근혜씨가 당 대표를 맡고 있었다.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들의 영향력 때문에 정작 나서겠다는 의원들의 숫자가 적었다. 국회의장 임기 후반에는 여당(열린우리당)의 인기가 급락해 이길 자신이 없으니까 개헌을 주장한다고 공격할 때 반박할 명분이 없어서 추진하지 못했다.”

-대통령 5년 단임제의 대안이 뭔가.

“대통령제의 문제는 국민 여론과 동떨어진 정책을 강행해도 탄핵 외엔 시정시킬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의원내각제의 경우는 큰 문제에 부닥칠 때 책임을 분산해 충격을 흡수하고 새로운 국면으로의 전개가 가능하다. 또 하나는 레임덕의 문제다. 대통령이 바뀌면 중요한 정책이 다 바뀐다. 그 비용이 너무 크다. 지방분권 등 노무현·김대중 대통령 때 해오던 것을 지금 다 바꾸려는 상황이다. 이건 이명박 대통령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다. 다만 당장 의원내각제로 가는 것보다 이원집정제 또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징검다리로, 단계적으로 가면 국민적 공감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쇠고기 정국으로 시끄럽다. 야당의 장외집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현재 내가 민주당의 상임고문이라 당에 초연한 입장은 아니다(웃음).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독립된 헌법 기관이고 국가의 지도자들이다. 반대를 하더라도 지도자답게 해야 한다. 시중의 사람들, 청년들이 하는 방법이 있고 의회에서 지도자가 할 방법이 있다.”

-이명박 정부가 취임 100일도 안 돼 지지율이 곤두박질치고 있다. 어느 면에서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고 보나.

“대통령이 된 다음 국정 운영 면에서 안하무인한 측면이 있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소수자를 존중하고, 포용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인데 그 점을 소홀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과거를 무조건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하고 10년 동안 이룬 것까지 모두 부정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1997년 11월 13일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상임집행위원 7명이 국민회의에 입당했다. 당시 김대중 국민회의 대통령 후보는 대선을 한 달여 앞둔 시점에서 이뤄진 야권 개혁세력의 합류를 크게 기뻐했다. 앞줄 왼쪽부터 당시 김원기 통추 대표, 김대중 후보, 김정길·노무현·박석무 통추 상임집행위원. 뒷줄 왼쪽에서 둘째는 정동영 국민회의 대변인.

-가장 기억에 남는 정치인은 누군가.

“내게는 허주(虛舟·고 김윤환 의원의 호)다. 오랜 정쟁의 역사 속에서 대화와 협상을 통해 많은 문제를 풀어낸 기간이 허주와 내가 양당의 교섭창구가 됐던 시기다. 그때야말로 대화정치가 살아있는 시기였다.”

-정치란 뭔가.

“믿음이다. 가령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신뢰 관계가 무너지니 대통령도 괴롭고 당도 괴롭고 결과적으로 국민도 집권 여당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 정치인 개개인의 관계도 신뢰고, 정치인과 국민도 신뢰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정리=김경진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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