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전 사극, 불가능은 없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4호 09면

“불가능한 것은 없어. 난, 일지매니까!” 이렇게 외치며 등장한 새로운 드라마의 영웅 ‘일지매’는 정말 모든 것이 가능한 도적이다. 한옥 지붕 위를 붕붕 날아다니며 땅에서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것은 물론 그 시대에 가능했을까 싶은 얼굴 특수 분장과 심지어 투명 망토까지. 얼굴의 반을 가리는 마스크가 멋진, 철갑을 두른 일지매의 활약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냐를 운운하는 것은 새롭게 등장한 이 ‘퓨전 사극’이라는 장르의 드라마를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윤정의 TV 뒤집기

얼마 전 끝난 ‘쾌도 홍길동’에선 선글라스 낀 파마머리 홍길동(강지환)에 오색찬란하면서도 그 세련미가 레드카펫 위의 드레스 못지않았던 허이녹(성유리)의 의상에 섹시 댄스 군무까지 등장했다. 요컨대 시대적 배경은 현대극의 리얼리티에 대한 의무감을 덜어주는 장치가 되고, 거기에 온갖 쿨한 패션을 끌어들이면서 사극은 ‘빈티지’풍의 독특한 트렌디 드라마로 변한 것이다. 앞으로도 ‘최강칠우’니 ‘ 바람의 화원’ 같은 퓨전 사극이 계속 등장할 예정인데 과감한 시대파괴적 상상력에 임하는 마음가짐은 이래야 할 듯하다. ‘불가능한 건 없어, 이건 퓨전 사극이니까’.

다소 조잡한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매화꽃 흩날리는 화면에 ‘난 일지매니까’라는 식의 만화적인 대사가 엉성해 보이기는 해도 주인공이 이준기라면 논리를 잊고 몰입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키도 크지 않고 꽃미남도 아닌 이 배우는, 그러나 날렵하면서도 서늘하게 현실의 벽을 뛰어넘을 듯한 매력이 흘러 넘친다. 현 정국에 대해 말한 연예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날 선 발언을 최근 자신의 미니홈피에서 했던 그는 비현실적인 가상의 존재이면서도 현실의 비리들을 단죄했던 의적 일지매의 이미지와 더할 나위 없이 딱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첫 회 초반 날아다니는 이준기의 이미지로 기대를 한껏 부풀렸던 드라마가 아역배우를 내세운 어린 시절 이야기로 들어가면서 구태의연해진 것은 실망스러웠다. 이것도 요즘 사극의 트렌드라고 해야 할지.

‘이산’이나 ‘왕의 남자’, 혹은 그 이전 ‘대장금’에서처럼 기가 막히게 귀여운 연기를 펼친 아역들의 활약이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씨앗을 품는 역할을 하고 이후 드라마에 대한 기대를 부풀리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지매’ 1, 2회의 어린 시절은 그냥 단지 아역 부분이 공식처럼 등장해야 하기 때문에 나온 것일 뿐 그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역모의 누명을 뒤집어쓴 아버지(조민기)의 억울한 이야기, 현재 아버지(이문식)와의 인연과 미래의 연인 이야기까지, 과거의 이야기들은 선악 대결 구도의 주인공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저 이런저런 갈등만 쏟아냈다. 거기에 3회부터 등장한 성인 일지매 이준기와 봉순 이영아의 캐릭터는 아역 시절과는 전혀 동떨어진 코믹한 분위기로 등장해 일관성도 없었다. 일지매가 과거의 충격으로 기억상실증을 앓기 때문이라는 설정을 집어넣긴 했지만.

새 옷을 입고 새로운 상상력으로 오늘날의 드라마를 뛰어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퓨전 사극’이라면 좀 더 새로운 접근법도 보여줘야 할 것이다. 출생의 비밀, 바뀐 부모, 기억상실 같은 새롭지 않은 설정에 공식처럼 집어넣은 아역 부분 같은 기존 드라마의 구습을 되풀이한다면 제아무리 멋진 패션의 일지매라도 매력 있게 보이긴 힘들 테니 말이다.


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 출신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