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소리 없이 쓰러진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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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 02면

올 들어 서울중앙지법 파산부에 회생 절차(옛 법정관리) 개시를 신청한 기업이 24일 현재 34개에 달한다. 지난해 전체 신청 기업 수(29건)를 넘어선 것이다. 지난해는 한 달에 2.4개꼴이었다면 올해는 6.8개꼴. 회생 신청이 급증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신청 기업에 대한 현장 취재와 신청서 분석을 통해 기업들의 어려움을 살펴봤다.

경기침체, 원자재값 상승, 고금리의 ‘트라이앵글’

서울의 한 제조업체. 1층에 사무실이, 2층에 공장이 있는 전형적인 중소기업이다. 안으로 들어섰다. 사장 A씨가 일어선 채로 어딘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하다.

전화를 끊고 기자와 마주 앉은 A씨의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다. 50대 중반의 나이. 그의 책상 위에 놓인 ‘관리인’ 임명장이 눈에 띈다. 회생 신청을 하면 채권자의 강제 집행이 정지된다. 회생 절차에 들어갈 경우 정상적인 기업으로 부활할 가능성이 커진다. 하지만 법원 지시에 따라 경영을 해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A씨는 사장이 아니라 관리인이다. 이 회사의 자산 규모는 15억원, 부채는 50억원이다.

올해 서울중앙지법에 회생 신청을 한 기업을 업종별로 보면 제조업이 10개로 가장 많다. 건설업(6개), 정보기술(IT) 관련업(3개)이 그 뒤를 잇는다. 이외에 의약품 개발업체, 화물 운송업체, 관광회사 같은 다양한 업종의 기업이 신청했다. 외환위기 직후 자산 규모 수조원대의 대기업이 주로 회생 신청을 했으나 요즘은 중소기업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부도액을 기준으로 하는 한국은행의 어음 부도율 통계에는 이러한 상황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기업들이 ‘소리 없이’ 쓰러져 가고 있는 것이다.

“회사가 어려워진 게 언제지요?”
기자의 물음에 A씨는 “4년 전부터”라고 했다. 외환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하는가 싶던 2004년 전체 매출의 40%를 차지하던 해외 브랜드 업체가 제품 공급 루트를 한국에서 중국으로 바꿨다. 바로 적자가 나기 시작했다. 은행 등 금융기관 대출로 적자를 메워 나갔다. A씨가 타개책으로 삼은 것은 수출 확대였다.
“일본과 미국으로 거래처를 넓혀 보려고 했습니다. 무역 파트 인원을 충원했고요. 하지만 세상 일이 생각처럼 안 되더군요.”

회생 신청서를 읽어 보면 중소기업들이 겪은 고통이 손에 잡힐 듯하다. 기업들의 경영난은 하루 이틀에 생긴 것이 아니다. 공장이나 사무실, 개인 부동산까지 담보로 잡으며 대출로 짧게는 1~2년, 길게는 5~6년씩 생명을 연장한다. 한 액세서리 제조업체의 경우 금·은 등 원자재 값 급등으로 대규모 결손을 낸 것이 위기의 시작이었다. 한 중소 건설업체는 2003년 이후 지방 건설경기 하락과 함께 아파트와 주상복합건물이 대거 미분양된 게 회생 신청의 원인이 됐다. 이 경우 기업들은 회사 규모나 직원 수를 줄이는 구조조정 대신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다른 회사와의 인수합병(M&A)이나 제품 개발, 거래처 다변화가 그것이다.

이 회사 대차대조표를 펼쳤다. 대출 이자가 2005년 1억8000만원에서 2006년 2억2000만원, 지난해는 2억7000만원으로 늘었다. 금리가 가파르게 뛰었기 때문이다. 회사가 어려워지자 금융기관의 대출 회수 압력도 세졌다.
“맑을 때 우산 빌려 줬다가 비가 내리면 우산을 뺏어 가는 것 아닙니까. 신용보증기금에선 매년 10%씩 원금을 갚으라고 합디다.”

결국 사채를 빌려 써야 했다. 기자가 사채 규모를 묻자 A씨는 자존심이 상하는 듯 눈길을 돌렸다. 그런 그가 회생 신청까지 하게 된 계기는 지난해 10월 하청을 주던 대기업이 ‘거래 중지’를 통보하면서였다.
“20년간 이어온 거래 관계를 하루아침에 끝내자는 겁니다. 정식 통보서류 한 장도 없이…. 1월 어음 만기는 돌아오고,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생각에 ‘서초동’(법원)을 찾게 됐지요.”

물이 서서히 끓으면 물속 개구리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죽게 된다. 기업도 큰 외생 변수가 없는 한 연명에 급급하게 된다. 경기침체, 원자재 값 상승, 고금리의 ‘트라이앵글’ 속에서. 그러다 때를 놓치기 일쑤다. 서울중앙지법 파산부 이용운 판사는 “대부분이 부도를 낸 뒤 운영자금도 확보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신청하는 탓에 회생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며 “재정 파탄이 심해지기 전에 신청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A씨의 책상에는 ‘사원 가족 야유회’ 사진이 놓여 있다.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속 직원 60여 명은 이제 40명으로 줄었다. A씨는 “회사는 이미 내 손을 떠났다”며 “법원 회생 절차를 통해 남은 직원들이라도 지켜 줬으면 하는 게 마지막 바람”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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