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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전사, 아랍의 수퍼 히어로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3호 06면

유전(油田)이 고갈된 2050년의 소년 갱단, 고대 파라오의 후예인 검은 머리 전사, 공군 작전을 신출귀몰하게 수행하는 요르단 파일럿….
최근 중동에서 각광받고 있는 만화 캐릭터들이다. 할리우드 수퍼 히어로물에서 중동 문물과 아랍인은 안티히어로(Anti-hero) 정도로만 등장하지만 여기선 다르다. 이들은 도시와 동료를 구하고, 이슬람을 공격하는 세력에 맞서 싸운다. 말하자면 이들은 아랍의 수퍼 히어로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전통이 빛나는 중동 문화는 예부터 미국 애니메이션에 알라딘과 지니 등 풍성한 캐릭터를 선사해 왔다. 하지만 자체로는 만화·애니메이션 창작 전통이 없었다. 중동의 첫 만화 전문 출판사 AK 코믹스(AK Comics)가 이집트 카이로에 설립된 게 2003년이다. 이어 쿠웨이트에 테시킬 미디어(Teshkeel Media)가, 요르단 암만에 아라님 미디어 팩토리(Aranim Media Factory)가 문을 열었다. 이들의 목표는 한결같다. 수퍼맨·배트맨과 다른, 아랍 문화와 전통을 대변할 수 있는 수퍼 히어로를 창조하는 것이다.

9·11 테러 후 아랍 히어로 대거 등장
이러한 아랍 히어로들의 등장이 2001년 9·11 테러 직후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알카에다의 테러 위협으로 아랍계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이 끓어오를 무렵이다. 요르단 유학생 술레이만 바키트(Suleiman Bakhit)가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 집단 구타를 당한 것도 이맘때였다.

바키트는 아랍인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 미국 어린이와 대화하던 중 “아랍에도 수퍼맨 같은 영웅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제야 아랍엔 수퍼 히어로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만약 있다면 어떤 생김새여야 할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파이낸셜 타임스 5월 7일자 인터뷰) 암만에 돌아간 바키트는 아라님 미디어를 설립하면서 자신의 상상을 구체화했다.

1979년생인 바키트의 유년 시절은 수퍼맨·배트맨·스파이더맨 등 서구의 수퍼 히어로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팬티를 겉옷에 덧입은 영웅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하기란 쉽지 않았다. 모국어로 말하고, 캐릭터와 배경이 자신과 흡사한 영웅이 절실했던 것이다. AK 코믹스의 설립자 아이만 칸딜(Ayman Kandeel) 역시 “아랍 청소년층의 문화적 공백을 메우고 중동식 역할 모델을 제시하고 싶었다”(‘요르단 비즈니스 매거진’과의 인터뷰)고 창사 취지를 밝힌다.

이들이 만들어낸 주인공들은 어린이·청소년은 물론 토착 영웅에 굶주렸던 어른까지 끌어안으며 인기를 끌고 있다. AK 코믹스가 발간하는 월간 만화잡지 ‘스페이스툰타운’은 영어와 아랍어 두 판본으로 매월 1만 부 이상 팔린다. 제인·잘릴라 등 인기 캐릭터는 스파이더맨을 제치고 미국 굴지의 제과회사 캐드버리 애덤스의 중동 수출용 풍선껌에 새겨지기도 했다.

세계로 가는 아랍의 로컬 영웅들
아랍 수퍼 히어로들은 ‘중동 청소년에게 미국 수퍼 히어로를 대체하는’ 본래 목적을 넘어 미국 독자층에까지 침투하고 있다. 99명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테시킬 미디어의 만화 ‘99’는 2006년 미국에 상륙한 이래 언론과 만화 애호가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고 있다. 신이 99가지 속성을 구현한다고 믿는 이슬람 종교에서 제목과 내용을 따온 이 만화는 오히려 사우디아라비아에선 판매 금지됐다.

신성을 인격화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성직자들의 입김 때문이다. 반면 창의적인 이야기와 차별화된 캐릭터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미국 자본은 2003년 이래 테시킬 미디어에 700만 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동서양의 문화적 틈을 메워주기를 희망”한 쿠웨이트 제작자들의 소망이 실현되기에 앞서 동서양의 자본이 먼저 융합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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