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씨 비자금 파문-불발로 그칠까 盧씨 대선자금 폭탄발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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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 진영은 과연 초기의 「엄포」대로 여야에 대한 대선지원 자금을 모두 공개할 수 있을 것인가.사건이 터지자 세인은 「발언의 폭탄」이 터질지 매우 궁금해했다.
그러나 1차 폭탄은 불발했다.27일 대국민사과에서 盧씨는 이에 대해 일언반구 얘기하지 않았다.일단은 맥없이 주저앉은 것이다.盧씨는 끝까지 사법처리를 면하기 위해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나 정치권을 자극하는 길을 피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뇌관이 완전히 해체된 것은 아니다.꼭 검찰에 제출할 소명서가 아니더라도 출두답변에서 盧씨측은 방아쇠를 당길수 있다.아직도 핵심측근은 여권의 선(先)공개의사에 대해 『철없는 얘기』라며 협상카드의 유효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盧씨 사건은 정치권의 폭탄발언 터지기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보여주었다.또한 「폭탄의 역사」는 이를 증명하고 있다.
5공 이후 폭탄발언 파문은 여러차례 있었다.중요한 것은 「폭발」의 위협은 있었으나 결국 한번도 제대로 터진 적은 없었다는점이다.약자가 꺼내 놓는 최후의 카드였던 「폭탄발언」위협은 결국 강자의 배짱 앞에 픽 꺼지곤 했다.약자는 대 신 은근한 위협의 대가로 사약대신 형을 살거나 곤장을 맞는 「감형」에 만족해야 했다.
88년 11월 5공청문회 직전 장세동(張世東)전경호실장은 『내가 입을 열면 난장판이 된다』『내가 폭탄선언을 하면 모두가 불행해진다』며 6공측에 노골적인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張씨는 『정치는 감춰진 부분도 있어야 한다』『정치하는 사람들이 돈을 구하려고 공갈도 치고 구걸도 했을텐데 그걸 다 얘기하면 난장판 밖에 더 되겠느냐』고 6공과 정치권을 위협했다.
때문에 그가 청문회에 나타났을 때 세상은 그의 입을 주시했다.그러나 張씨는 폭탄은 커녕 수류탄도 까질 못했다.그는 나중에조용히 감옥으로 갔다.6공측은 『장세동은 절대로 실형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이듬해 張씨는 10개 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 또한 89년 12월 국회증언대에 서기전 「폭탄발언」의 위협을 꺼냈다.『절대 증언은 없을 것』이라고했던 6공측이 이를 번복하자 잔뜩 골이 났던 것이다.
그는 『연내 5공청산을 종결하고 빠른 시일안에 하산케 해달라』며 『폭탄선언도 불사하겠다』고 말했다.그것은 노태우(盧泰愚)당시대통령에 대해 엄청난 자금을 지원한 것과 6.29의 내막을폭로할 수 있다는 위협이었다.
긴장한 6공측은 한때 백담사 서면질의를 고려하기도 했다.盧대통령이 全씨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내가 찾아가겠다』며 구슬린끝에야 全씨를 증언대에 세울 수 있었다.하지만 결국 이 때도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6공말에도 차기를 노리는 박철언(朴哲彦)당시 정무장관의 폭탄발언 파문이 있었다.러시아방문 후 김영삼민자대표와 정면으로 충돌한 朴씨는 장관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당시 민주계가 원색적으로 朴씨를 성토하자 그는 3당합당 당시 「내각제 합의」를 겨냥해 폭탄발언 위협을 했다.그는 자신이 입을 열면 『金대표의 정치생명은 끝장』이라고 운을 떼기도 했다.
盧대통령이 마지못해 YS의 손을 들어주자 「세불리」를 의식한그는 『폭탄선언이 나라와 민족의 장래에 도움이 안된다』『내가 축제굿판의 마지막 제물이 되겠다』며 슬그머니 목소리를 낮추고 말았다. 새정부들어 사정의 소용돌이 속에 박태준(朴泰俊)씨가 탈세혐의로 수사를 받자 그의 비자금 사용처를 둘러싼 「TJ뇌관」이 부각됐으나 결국 터지지 못했다.
이렇듯 대부분 권력핵심층의 인사들이 제기하는 폭탄발언 위협은정치협상.자금 등을 까발려 『모두의 속곳을 들추겠다』는 협박이었다.실제로 뇌관이 터질 경우 발언자나 대상 모두가 피해를 본다는 내용이었다.
盧씨의 대선자금 지원이라는 폭탄이 스스로,또는 외부의 충격으로 터져버릴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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