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Eye] ‘크렘린 회사’와 새 러시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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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 36면

러시아가 2020년까지 세계 5대 경제대국을 표방하고 나섰다. 미국·중국·인도·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유럽 최대의 경제대국이 되겠다는 야심 찬 포부다. 이른바 ‘푸틴의 2020 비전’이다. 지난해 초 러시아 경제개발무역부가 입안한 경제발전보고서는 2020년까지 세계 10위권을 표방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당시 대통령이 이 보고서의 비관적인 시나리오를 모두 빼고 장밋빛으로 만든 것이 ‘2020 비전’이다.

2주 전 푸틴은 총리에 취임하면서 지난 8년 동안 대통령으로서 추진해 왔던 국가적 과업을 실천에 옮기겠다고 다짐했다. 신임 드미트리 메드베테프 대통령은 ‘4 I’ 전략으로 이 비전을 뒷받침했다. 혁신(Innovation), 투자(Investment), 인프라(Infrastructure), 자율적 사회기구(Institution)다. 메드베테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4 I’가 제대로 작동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시민적 자유를 신장하는 일이 자신에게 부과된 최대 임무라고 강조했다. 정치권력이 소수의 거대 국영회사를 움켜쥐고 마피아처럼 나라 경제를 주무르던 소위 ‘크렘린 회사(Kremlin Inc.)’가 과연 10년여 만에 유럽 제일의 경제대국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는 실로 기이한 형태의 자본주의를 운용하며 경제를 고속 성장시켜 왔다. 특히 푸틴 치하 8년 동안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7.2%였다. 외환보유액은 국내총생산(GDP)의 30%로 세계 3위, 주가지수는 20배로 뛰었다. 외제차에다 해외여행, 일본 스시(초밥) 등으로 외식을 즐기는 중산층도 크게 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경제적 성공에는 물론 석유와 가스가 큰 역할을 했다. 러시아는 세계 2위의 산유국이고, 석유수출국기구(OPEC) 이외 석유 증산량의 80%를 도맡아 왔다. 석유 및 가스가 전체 GDP에서 점하는 비율은 30%가 넘고 국가 전체 세수의 50%, 수출의 65%를 차지한다. 석유와 가스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그러나 유가가 영원히 오를 수는 없다. 산유량은 지난해 10월 하루 990만 배럴로 정점에 달한 이후 1000만 배럴 선을 넘지 못하고 있다. 기존 유전들의 노후화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 에너지산업의 고용은 전체의 2%에 불과하다. 나머지 98% 부문의 고용이 활성화되고 경쟁력이 확보되어야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

게다가 극심한 부의 불평등과 부패가 발목을 잡고 있다. 러시아의 억만장자(billionaires) 87명의 재산은 4710억 달러로 GDP의 30%에 육박한다. 미국 억만장자 469명의 재산이 미국 GDP의 10% 수준이고 보면 빈부격차는 미국보다 훨씬 심하다.

더 큰 문제는 기회의 불평등이다. 여론조사에서 러시아 국민 대다수는 돈을 버는 데는 변칙과 범법, 정치적 연줄이 필수적이라고 믿고 있다. 러시아 관료조직은 경제자유화로 너무도 잃을 것이 많아 부패 추방에 필수적인 정치적 자유와 언론자유, 시민사회의 활성화에 제동을 걸어왔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자유는 만물의 혼이다. 법의 노예가 아니라 법에 순종하기를 원한다”는 제정 러시아 예카테리나(캐서린) 대제의 말을 인용하며 게임의 룰 확립과 이를 통한 국민 잠재력 극대화가 일류국가에의 지름길이라고 국민을 설득하고 있다.
러시아는 경제적으로 신흥국가이면서도 옛 초강대국이란 양면성을 갖고 있다. 산업생산이 중국과 인도 수준이면서 임금은 이들보다 훨씬 높아 아시아의 싼 노임 국가들과는 경쟁이 안 된다.

그러나 군사·우주·항공 분야 등의 첨단기술과 잘 교육된 인력 및 연구력은 지금도 세계 최상급이다. ‘4 I’로 선진국 따라잡기 게임을 하면서 러시아제국과 소련의 좋은 유산을 선진화의 동력으로 활용한다면 21세기 경제적 수퍼파워로 화려하게 부활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5대 경제대국의 각축을 상정한 ‘푸틴의 2020 비전’이 구한말 열강 각축전의 21세기적 리바이벌이 되지나 않을지 벌써부터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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