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알까 모자 푹 눌러 쓰고 운전면허 학원 다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2호 10면

18대 국회 입성에 실패한 낙선 의원들의 이삿짐이 1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복도에 쌓여 있다. 오종택 기자

한국화를 잘 그리는 김충조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은 16년간 놓았던 붓을 4년 전 다시 들었다. 그에게 잊혀졌던 예술혼이 다시 불타 올랐던 것일까. 김 최고위원은 “그런 차원이 아니다”며 “빚도 만만치 않은데 (17대 총선에)낙선하고 나니 돈을 구할 길이 막막해 그림을 팔아 돈을 마련하려 한 것”이라고 털어놨다.

낙선 경험자들이 말하는 ‘평민의 추억’

정치권에는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선거에서 떨어진 국회의원은 사람이 아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막강한 국회의원이지만, 낙선 후에는 권한이 허망하게 사라져 일반인보다 더 초라하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299명의 17대 의원 중 18대 국회에 들어오지 못한 인사는 160여 명. 임기가 끝나는 5월 30일부터 그들이 겪어야 할 ‘팍팍한 삶’은 어떤 것일까.
 
모이던 돈이 뚝…은행도 돌변

계속되는 김충조 최고위원의 얘기. 어느날 은행으로부터 ‘채무 기간을 연장하려면 채무액의 10%를 변제하라’는 통보가 왔다. 김 위원은 그 길로 은행에 달려갔다. “현역 때는 한번도 그런 요구가 없더니 어떻게 된 일이냐. 의원 직에서 떨어졌다고 당장 10%를 갚으라니, 힘없는 서민들에게 당신네들이 얼마나 고압적으로 굴지 짐작이 간다”며 따졌지만 은행 측은 꿈쩍도 안 했다. 그림 판 돈이 은행으로 갔다.

재직 시 받던 ‘1억원대 연봉’과 활동지원비 등이 끊기고 후원금 모금도 금지된다. 이부영 의원 비서관을 지냈던 장성철씨는 “월 2000만원 가까운 현금이 사라진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사무실 운영비도 막막하다. 16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박종희 한나라당 당선인은 “구·시의원들에게 20만~30만원씩 도움을 받아 운영이 가능했다”고 털어놨다. 14, 16대 의정활동을 했던 장광근 한나라당 당선인은 “시·구 의원들의 공동사무실 형태로 당협위원회를 운영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럴 경우 지방의원들의 눈치를 봐야 된다”고 말했다.
 
운전 학원에 모인 그들

4선을 했던 김영진 통합민주당 당선인은 “돌려주는 전화만 받다가 직접 걸어야 하는 처지가 되니 처음에 잘 적응이 안 되더라”고 말했다. 보좌진·운전기사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운전 학원에 등록한 그는 면허시험장 사람에게 “얼마 전 강삼재 전 한나라당 사무총장이 합격했는데 의원님이 떨어지면 금방 소문날 겁니다”는 말을 듣고 바짝 긴장했다.

김충조 최고위원은 운전 학원을 다닐 때 사람들이 알아볼까 봐 허름한 옷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핸들을 잡았다.

15, 16대 의원을 지낸 원유철 한나라당 당선인은 논스톱으로 이뤄지던 공항 출국수속이 2시간가량으로 늘어난 것을 경험하면서 낙선을 실감했다.
 
우울증과 무기력감

지난 총선에서 공천 탈락한 한 3선 의원은 요새 병원 출입이 잦아졌다. 그의 보좌관은 “건강에 별 이상은 없는데 심리적 불안감 때문에 그러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다른 비서관은 “주위에서 들리는 ‘저 사람 안됐다’는 말이 더 상처가 된다”며 “상실감 때문에 눈빛이 달라진다”고 전했다.

15대 의원을 지낸 이사철 당선인은 “낙선자 시절에는 아무리 지방자치단체와 중앙정부에 지역 민원을 해도 말발이 안 먹히더라”며 “당선되고 나니 180도 바뀌어 해묵은 민원을 벌써 두 가지나 처리했다”고 말했다.

각종 행사 때 의전이 확 떨어지는 것도 상처다. 장광근 당선인은 “내가 추천해 당선된 시·도 의원들보다 자리나 발언권이 뒤쪽으로 밀렸을 때 원외의 서러움을 절실히 느꼈다”고 고백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