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68. 셀 수 없는 ‘최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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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유럽 5개국을 돌며 TV쇼를 촬영할 당시의 필자.

해방 뒤 일본 정부가 공식 초청한 최초의 한국 가수(1960년), 대중가수 최초로 리사이틀이라는 표현 사용(62년), 국내 최초의 창작 뮤지컬 주연(66년),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방송 프로그램 진행(67년). 돌이켜보니 지난 50년, 가수 패티 김의 여정에는 유난히 최초라는 기록이 많다. 세종문화회관(78년·89년)을 비롯해 캐나다 토론토 오페라하우스(7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하우스 ‘데이비스 홀(Davis Hall)’(83년),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99년) 등 세계 유명 콘서트 홀에서의 한국 대중가수 최초 공연, 그리고 서울시립교향악단과 대중가수 최초 협연(85년), 국내 최초 유럽 5개국 TV쇼 촬영, 국내 최초의 해외 로케 CF 촬영 등등.

이렇게 많은 최초 기록이 따라다니니 인터뷰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질문도 이와 관련된 것이다.

“유난히도 최초 기록이 많은데, 최초 기록을 즐기시는 거 아닌가요?”

“두 번째는 재미없잖아요? 달나라에도 처음 간 사람만 기억하고, 올림픽의 하이라이트인 마라톤에서도 처음으로 피니시 라인에 들어온 사람만 기억하듯이 처음이라야 기억도 잘 할 수 있을 테고….”

물론 나는 최초를 좋아한다. 그리고 최고를 지향한다. 하지만, 내가 최초를 좋아하고, 최고를 지향하는 것은 비단 대중들이 나를 기억하기 쉽도록 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지난 50년 동안 나를 쉼 없이 달리게 하고, 더욱더 가혹하게 채찍질한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나 김혜자는 가수 패티 김을 위해 80% 이상 희생하고 양보해 왔다”는 말은 사실 내 생각이 아니다. 지난 세월 내 남편이나 딸들 다음으로, 아니 어떤 면에서는 그들보다 훨씬 더 나를 가까이에서 보고 많은 시간 함께 해준 막내 동생이 나를 두고 한 말이었다.

혹독하리만큼 절제하고 참으며 가수 패티 김을 관리하면서 살아온 내가 어떤 때는 내 스스로 생각해도 가엽고 안쓰럽고 또 한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자 막내 동생이 이렇게 말했다.

“언니 안에는 평범한 인간 김혜자와 가수 패티 김이라는 두 명의 사람이 함께 존재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걸 수치로 나눠보자면 김혜자가 2, 패티 김이 8이야. 김혜자는 패티 김에게 항상 80%는 양보하고 살잖아요! 안 그래요?”

그렇게 애써온 나를 알고 인정해주는 가족이 있어 기뻤고, 그 힘이 오늘의 나, 패티 김을 있게 했다고 생각하니 더할 나위 없이 자랑스러웠다. 앞으로 나에게는 또 얼마만큼의 최초 기록이 허용될까?

99년 데뷔 40주년 기념 대공연을 한 이후 지난 10년 동안 내 삶의 목표는 50주년을 무대 위에서 맞이하는 것이었다. 그 목표를 이룬 지금, 나는 또다시 목표를 세우기로 한다. 그리고 그것 역시 최초라는 기록이 함께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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