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흰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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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흰꽃’ - 김종길(1926~ )

여기는 지금 초여름.

그 흔해빠진 아카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찔레며 조팝나무며 이팝나무,

그리고 이웃집 담장 안의 불두화까지,

모두들 녹음을 배경하여

흰 꽃을 소담하게 피웠다가

더러는 벌써 지기 시작하네.

흰 꽃은 늙은이들,

또는 죽은 이들에 어울리는 꽃.

올해는 나 혼자 이곳에 남아

그 꽃을

보네.


여기는 지금 초여름. 그 흔해 빠진 아카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찔레며 조팝나무며 불두화까지 피었다. 흰 꽃은 늙은이들. 벌써 지기 시작한 흰 꽃. 그 꽃을 바라보며 속과 비속,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아득한 현기(眩氣)는 그래서 다사롭다. 시름을 깨달아 옷깃을 여미게끔 하는 실핏줄의 노래는 우리 생애의 유서 깊은 만사. 그리하여 월명사는 생사가 여기에 있다고 하였으며 저편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다고 했던가. 뿌리를 읽는 늙은 시인의 눈빛. 짙은 초여름 녹음에서 해거름을 뽑아 은은하게 생을 노래하는 시인. 흰 꽃을 본다. 더러는 져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도 보인다. <박주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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