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한국현대사>48.문서에 나타난 韓美관계 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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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60년대 한-미관계는 최대 현안이던 한-일국교정상화.베트남파병문제 등이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원만하게 해결됨으로써 순탄한 관계를 유지했다.이후 한.미 양국은 주한미군 철수문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까지 밀월관계를 지속했다.
60년대 한-미관계의 첫 관문은 5.16군사정변에 대한 미국의 인정과 박정희(朴正熙.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케네디간의 정상회담이었다.특히 61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린 박의장과 케네디간 두차례 회담은 우호적인 한-미관계를 예고하는 것이었다.이회담에서는 주로 한-일관계,베트남의 상황,미국의 대한(對韓)군사.경제원조 문제 등이 논의됐다.이 회담에서 박정희는 군사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와 경제원조에 대한 약속을 받아냈고 미국은조속한 민정이양과 한-일국교정상화 추진에 대한 확답을 얻었다.
회담직후인 61년 12월4일 미 국무장관은 주한(駐韓)미대사에게 보낸 전문에서 『박의장은 신념이 있고 자신감에 넘치며 정보에 밝고 정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며 『박의장은 미국 고위관리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고 평가했다.
63년 11월 존슨행정부가 출범하면서 한-미관계는 최고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박정희정권에 대한 존슨행정부의 지지입장은 64년 야당과 학생을 중심으로 전개된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최고조에 달한 「6.3사태」 때 분명하게 드러났다.
굴욕적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점차 고조되던 64년 4월21일 박대통령은 새뮤얼 버거 주한미대사를 급히 청와대로 불렀다.1시간30분 정도 소요된 이날 회담에서 박대통령은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경우 보일 미국의 반응 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이에 대해 버거대사는 『합헌정부로서의 권위와 법질서를 유지하는 길 외에 그 어떤 다른 길도 있을 수 없다』고 해 박대통령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좀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하며 군을 동원하더라도 미국은 양해할 준 비가 돼있다는 견해를 표명했다.미국은 박대통령이 여론에 밀려 자칫 한-일회담의 조기타결을 철회할 수도 있는 상황을 우려했던 것이다.
지난해 3월에 기밀해제된 국가안보회의 문서에 의하면 3월24,25일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을 때도 미국은 한국정부의 군동원에 동의했었다.
65년 5월 박대통령은 다시 미국을 방문해 존슨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이 회담에서 박대통령은 미국이 한국을 계속 지원하고 한국을 일본의 통제아래 편입시키지 않겠다는 보장을 요구했다.이에 대해 존슨대통령은 한국에 대한 원조가 계 속될 것임을확인시켜주고 베트남에 대한 한국군의 추가파병을 요구했다.
5월18일 양국 정상은 베트남지원에서 긴밀한 협조,대한 원조의 계속,주한미군 지위협정의 조기타결등 14개항에 합의했다.두정상은 회담 결과에 만족했다.존슨대통령은 『미국정부가 한국에 대해 지금보다 더 좋은 인상을 받았던 적은 없었 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66년 10월 존슨대통령은 한국을 방문,한국의 안전보장과 경제지원을 다시한번 확인해주고 베트남문제의 공동대응에합의했다.그러나 60년대 중반이후 남북관계가 긴장관계에 들어가자 한-미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 했다.특히 한반도 전체를 전쟁 일보직전으로까지 몰고갔던 68년 1월의 1.21사태와 푸에블로호사건이 나자 한-미관계는 아연 긴장관계로 빠져들었다.
65년이후 북한의 무장도발이 빈번해지자 한국정부는 이를 심각한 사태로 인식,유엔군사령부로부터 북한의 휴전선남침때 발포할 수 있는 작전권 일부를 인수했다.반면 미국은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한 상황으로 보지 않았다.66년 11월8일 작 성된 미CIA보고서는 『북한이 제2전선 형성을 노린 것 같지는 않다』고 평가했다.
1월21일 북한 무장유격대의 청와대기습사건이 발생했지만 미국반응은 냉담했다.현재 비밀해제된 존슨대통령기념도서관 소장문서에는 한국 안보에 직접 위협이 된 1.21사태에 대해 백악관이나국가안보회의에서 논의한 흔적이 없다.이 문제에 대해 미국은 당시 주한미대사와 주한미사령관에게 위임한 것으로 보인다.이들은 가능한한 1.21사태가 한국의 대북(對北)응징사태로 연결되지 않도록 억제하는데 주력했다.반면 1월23일 북한이 미국의 해군첩보선 푸에블로호를 나포하자 미국 행정부는 당시 가장 큰 관심사였던 베트남전 이상으로 정치적 관심을 갖고 대응했다.
한국정부는 한-미동맹관계에서 볼 때 1.21사태가 푸에블로호사건보다 더 중요한 안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하며 북한에 대해 공동으로 강경대응할 것을 촉구했다.또 푸에블로호사건과 관련된 대북협상에도 한국측이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해 야 한다고 주장했다.한국정부는 푸에블로호사건을 1.21사태와 분리하지 말고 연계성을 갖는 사건으로 취급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그러나미국은 한국정부와 상의도 하지 않고 북한과 비밀외교협상에 나섰다.미국은 한국의 국민여론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고 1.21사태를 하나의 단순한 무장공비사건으로 판단했던 것이다.미국은 박대통령이 독자적인 대북공격의사를 표시하자 대통령특사를 파견해 이를 사전에 방지하고 군사지원과 안보공약을 재천명함으로써 한국정부의 불만을 해소하려고 했다.
***「자의적 동맹」 나타나 한-미간의 불편한 관계는 68년5월에 열린 박정희-존슨회담에서 한-미안보장관회의 구성과 군수산업육성에 합의함으로써 일단락됐다.그러나 1.21사태와 푸에블로호사건으로 야기된 한-미간 갈등관계는 현실정치의 냉정한 논리를 그대로 보여준 다.미국의 이익과 직결된 푸에블로호사건과 한국에 대한 위협이었던 1.21사태에 대한 미국의 차별대응은 한-미관계가 우호적인 가운데서도 한-미상호방위조약에서 규정한 한-미동맹관계가 자의적이고 일방적일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이 것은 한국군의 독자적 행동을 가로막고 있는 군작전권이양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해결돼야 한-미동맹의 안정성과지속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사연구소 연구팀〉김상도.정운현.정창현 기자,이동현(현대사전문기자.政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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