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칼럼>관철동시대 56. 그랜드슬램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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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93년도,그러니까 한국바둑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서던 그해 6월까지의 바둑달력을 살펴보자.
〈1월〉 ①이창호 기성쟁취(4대3 조훈현) ②윤성현 패왕전도전자 ③유시훈 일본 신예토너먼트 우승 〈2월〉 ①한국팀 제1회진로배세계대회우승 ②이창호 대왕방어(3대1 서봉수) 〈3월〉 ①이창호 SBS연승전우승(2대1 장수영) ②조훈현 최고위탈환(3대1 이창호) ③조훈현 패왕 방어(3대1 윤성현) ④고바야시(小林光一) 일본기성 8연패 〈4월〉 ①조훈현 유창혁 후지쓰배세계대회 4강진출 ②오타케(大竹英雄) 일본 10단쟁취 〈5월〉①서봉수 잉창치배 세계대회우승(3대2 오타케) 〈6월〉 ①이창호 동양증권배세계대회 2연패(3대0 조치훈) ②이창호 비씨카드배 방어(3대0 조훈현) ③유창혁 왕위 방어(4대2 조훈현) ④윤현석 박카스배결승진출 ⑤조치훈 일본 본인방 5연패 ⑥충암출신 프로기사 1백단돌파 ⑦한.일컴퓨터바둑대 항전 한국우승 한국바둑계는 이글거리다가 화산처럼 폭발해버렸다.그 힘이 세계 4대기전을 향해 물밀듯이 나아가 6월에는 이미 진로배 잉창치배.동양증권배를 휩쓸고 마지막 남은 후지쓰배에 전력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사상초유의 「그랜드 슬램」을 눈앞에 두게됐다.
4인방의 멋진 교향곡이었다.그러나 돌이켜볼 때 연주의 시작은고요하면서도 한편 불길했다.이창호에게 연패한 조훈현은 2월에 접어들어 기력을 상실한듯 보였다.이 지칠대로 지친 시점에서 조훈현은 진로배세계대회 최종전 주자로 나서 일본의 다케미야(武宮正樹)9단과 우승을 놓고 맞섰다.
조9단은 그러나 지옥사자처럼 분전해 승리를 엮어냈고 이 승리를 기점으로 3월에 들어서자 이창호를 꺾으며 국내에서도 재기했다.뒤를 이어 서봉수.이창호도 세계대회를 제패했다.
쓰러질듯 하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조훈현과 서봉수,그리고 최강이창호가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또 한사람 유창혁6단이 6월 왕위전에서 조훈현을 4대2로 꺾으며 모습을 드러냈다.그리고는 조훈현과 함께 마지막 남은 후지쓰배를 향해 곧장 진군을 개시했다.
(이 막강한 4인방의 틈새에서도 윤성현5단.윤현석4단등 10대 강자들은 종종 결승전에 진출하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고 그들 충암출신은 6월에 프로 1백단을 돌파했다.) 세계 바둑계의관심은 후지쓰배로 총집중됐다.한국은 지난 5년간 일본의 텃밭인이 대회서만은 전혀 힘을 쓰지못했다.그러나 93년엔 두명이 준결승에 올랐다.한국이 독주하는 것을 일본이 그대로 방치할 것이냐. 7월3일 오사카.조9단은 일본의 가토 마사오(加藤正夫)9단,유6단은 일본의 아와지 슈조(淡路修三)9단과 대결했다.유6단은 초반 호쾌한 공격으로 앞서갔으나 한번의 대착각으로 형세를크게 상실했다.조9단은 시종 고전하며 완패 일보전에 서 허덕였다. 검토실에서 초조히 기다리던 한국팀 관계자들 사이에선 후지쓰배는 역시 안되나 하는 자탄이 터져나왔다.그런데 오후가 되자조9단쪽에서 먼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조9단이 사생결단의 강수를 던지며 저돌하자 「살인청부업자」란무시무시한 별명을 지닌 가토9단이 주춤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희망을 느끼며 한국관계자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국내의 염원을생각해서 한명이라도 결승에 올라가 달라고 애타게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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