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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의연하게 현기증 나게 개혁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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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대통령의 딸이었던 박근혜 의원이 한나라당의 대표로 태어났다. 그리고 새로운 모습의 한나라당으로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는 각오를 피력했다. 박근혜 대표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각에는 몇 가지 미묘한 여운이 남는다. 대통령의 딸이었다는 것이 朴대표의 이미지에 명암으로 비춰진다는 것, 그리고 이문열씨가 지적했던 것처럼 침몰한 상태로 우왕좌왕하고 있는 한나라호라는 파국의 잠수함을 건져 올려 어엿한 정치세력으로 거듭 태어나게 할 무거운 책무가, 곧잘 연약하다고 표현되는 여성의 어깨에 얹혀지게 됐다는 것에 염려와 기대가 교차한다는 것이다.

*** 동정표 얻을 생각 추호도 말아야

한나라당은 우선 원칙이 통용되고 깨끗하게 정화된 사회에서 살고 싶다는 국민적 여망에 오물을 뒤집어씌운 원죄부터 저질렀다. 혹은 국회의원이란 직함을 빌려 개인의 축재를 위해 기업의 돈을 받아 쓴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 가장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운용했어야 할 법을, 심지어 미친 짓이었다는 평판을 듣고 있을 만큼 감정적인 태도로 운용한 누를 범하기도 했다. 선거관리위원회의 석연치 못했던 태도와 가벼움은 그 이후에 따졌어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국민의 가슴속 밑바닥에는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 두말할 나위도 없이 정화된 정치세력으로 거듭 태어나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깔려 있다. 그런 바람은 여당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치는 필경 겨루어야 할 상대가 존재해야 하는데, 그 상대가 값어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한 체질을 가지고 있거나, 삼엄한 세척 과정을 거쳤다는 것인데도 묵은 때를 벗겨내지 못했다는 비난을 모면할 수 없게 된다면, 겨루기의 에너지를 잉태할 수 없게 마련이다. 이를 테면 세력의 균형감각이 훼손되면, 정치의 근본도 활력과 돌파력을 잃게 된다는 뜻이다. 그 폐해를, 바로 얼마 전 국회의사당 맨바닥에서 속수무책으로 넉장거리하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던 국회의원들의 모습에서도 충분히 목격한 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정심으로 국민의 표를 얻어낼 생각은 추호도 말아야 한다. 동정심이란 여름날 대낮에 문득 내리다가 어느새 뚝 그치는 소낙비 같거나, 하직 인사조차 남기지 않고 언제 어디로 훌쩍 떠나버릴 정처없는 나그네와 같은 것이다.

정치에선 남의 것을 토씨 하나까지 베껴먹는 커닝도 금물이다. 천박하고 줏대도 없는 하찮은 부류라는 비아냥거림만 받을 뿐이다. 미흡하다 하더라도 그 나름대로의 정치적 정절과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성가신 기상변화를 극복하는 바른 길이며, 오늘 죽어도 내일은 살아남는 길이라는 것을 믿는다. 특정 지역의 지지기반에 기대려는 안이하고 비겁한 생각도 가져선 안 된다. 파리한 얼굴로 안방에 들어앉아 문틈으로 바깥을 향해 고래고래 비명 지르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의 성품은 대체로 졸렬하고 허세에 능숙하다. 조여드는 냉소와 위협에 초조감이 있다 하더라도 의연하게 그러나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두 번 다시 되돌아 올 수 없을 정도로 통렬한 자기 비판과 장렬하고 결정적인 속도의 개혁을 한나라당은 겪어야 한다. 수치스러운 하반신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지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기득권에 연연하지 말고 그 온실에서 뛰어나오는 용기와 기백이 한나라당에는 필요하다.

*** 수많은 인내의 시간 거쳐야

그리고 앞으로 한나라당은 돈을 돌 보듯 해야 한다. 차떼기 당이라는 이미지에서 수월하게 벗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면 그 또한 일찌감치 버려야 한다. 한 번 고착된 부정적 이미지를 벗어나려면 수많은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개인적 경험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하고 있지 않은가. 당의 정체성, 혹은 공인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한데도 면접 과정에서 어쭙잖게 돈 번 자랑을 늘어놓았다가 일고의 논의조차 없이 공천에서 탈락시킨 열린우리당의 공천심사 사례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지금 한나라당의 새로운 대표가 된 박근혜 의원이 난마와 같이 얽히고 설킨 이런 난제들을 슬기롭게, 그리고 속도감있게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인지 많은 사람이 염려하면서, 그의 언행 하나 하나에 주의를 기울이며 바라보게 됐다는 것을, 또한 정면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김주영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