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학원 창문마다 가득한 판박이 비너스에 충격받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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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월 한 젊은 여성이 미대 입시학원이 즐비한 서울 홍익대 앞에서 입을 떡 벌리고 서 있었다. “학원 창문마다 마치 한 사람의 것처럼 똑같은 석고상 그림이 가득 붙어있는 장면은 충격적이었어요. 대체 어떤 미술 교육이 행해지고 있는 걸까 궁금했죠.”

교포작가 데비한(39)의 청자 비너스상, 비너스 사진 연작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해 비너스 두상을 청자로 만들었고, 이듬해엔 이 두상에 다양한 인종의 특성을 반영했다. 그래서 그의 비너스상은 입술이 두툼하거나 눈이 째져 있다. 데비한의 비너스는 고착화된 미의 기준에 던지는 물음표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 UCLA와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회화와 뉴미디어를 전공했다. 4년 전 작가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한국에 돌아와 비너스상을 통해 문화의 뒤섞임을 보여주는 작업을 하고 있다.

우리에겐 익숙한 것들을 그는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비너스상을 테마로 한 사진 시리즈 ‘여신들’은 비너스의 얼굴에 한국 여성들의 평범한 몸을 합성한 뒤 조각과 같은 질감이 나게 다듬은 것이다. ‘걷는 삼미신’은 서로 팔짱을 끼거나, 손으로 입을 가리고 수줍게 웃고 있다. 서구에서는 보기 드믄 동성 간의 신체 접촉이나 수줍은 포즈들이다. 주차장이나 백화점에서처럼 공손하게 두 손 모으고 허리 굽혀 인사하는 여신도 있다.

지난해 작업한 디지털 사진 ‘걷는 삼미신’(220×150㎝). 비너스와 아리아스의 석고 두상에 평범한 한국 여성의 몸을 결합시켰다.

“서구 미술관의 우아하고 이상화된 포즈와 달리 나의 시발점은 지금 여기, 즉 아시아, 한국이죠. 여성 신체를 통해 사회의 문화 형성을 말하고 싶었어요.”

신작 ‘스포츠 비너스’ 연작은 청자 비너스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나전칠기 방식으로 만들었다. 나무에 옻칠해 은은한 검정색이 된 비너스 두상에 자개로 야구공 무늬, 농구공 무늬를 넣었다.

“전 세계인이 공통적으로 즐기는 스포츠, 서구에서 시작해 전세계 여성미의 아이콘이 된 비너스에 한국 전통공예의 방식을 결합했어요.”

또한 2005년부터 한국·일본·독일 등지에서 일반 여성을 섭외해 그 나라의 음식으로 치장하고 찍은 사진 ‘식(食)과 색(色)’ 시리즈도 있다. 고춧가루 바른 입술을 육감적으로 내민 한국인 교사, 벗은 몸에 어묵을 목걸이처럼 두른 일본인 바이올리니스트 등이 등장한다. “여성의 관능미가 음식처럼 소비되는 광고 사진을 패러디해 평범한 여성들로부터 숨겨진 아름다움을 끌어내는 프로젝트”라는 설명이다.

경기도 헤이리의 갤러리 터치아트에서 다음달 1일까지 열리는 그의 개인전엔 ‘여신들’ 사진 연작, ‘스포츠 비너스’ 연작 등 25점이 나왔다. 031-949-9435.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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