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절반의 실패" "전체의 성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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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몫.배분(配分)」이란 의미를 지닌,다분히 딱딱한 느낌의「할당(割當)」이란 용어가 있다.세계무역기구(WTO)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구미 국가들의 한국 상품 수입규제를 곧바로 연상시키는 말이어서「울림」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다.그런데 바로 이 개념이 요즘 여성계의 핫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여성고용할당제」라는「낯선 용어」를 통해.
「95베이징(北京)선언」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지난달 말국내 69개 여성단체들의 모임인「할당제 도입을 위한 여성 연대」는 총회를 열고 사뭇 도전적인 요구 사항을 결의했다.『국회 전국구 39개 의석 전부를 여성에게 배정하라』『 여성 30%의정치할당제.고용할당제를 실시하라』-.
많은 남성들에게 아직은 낯설「여성고용할당제」란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을 체계적으로 높이기 위한 적극적 조처이자「차별이 제거될 때까지」라는 한시성(限時性)을 지닌 법적.정치적 수단이다.
용어 자체가 이렇듯 원론적 설명을 필요로 할만큼 한국의 여성인력 활용은 아직 초보단계다.94년 국제경영연구소(IMD)와 국제경제포럼(WEF)이 공동작성한「국가경쟁력보고서」를 보면 한국은 고용관행에서 성차별이 가장 심한 나라중 하나 다.또 95년 국제연합개발기구(UNDF)의「인간개발보고서」는 한국의 여성개발지수(GDI)는 1백30개국중 37위,여성세력화지수(GEM)는 1백16개국중 90위라고 밝혔다.
이 수치로도 추측할 수 있듯 국내의 할당제 논의는 그간 탁상공론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88년 이후 거의 매년 한국여성개발원.제2정무장관실등이 세미나를 열어 정치및 국가정책 결정기구에 10~20%의 여성참여를 보장하라고 요 구해왔는가 하면 민간 여성단체들도 건의와 대안 제시를 거듭하면서 94년을「여성정치참여 확대의 해」로 정해「할당제 도입을 위한 여성연대」까지 결성했다.지난달 중순엔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주최로「여성고용할당제 어떻게 할 것인가」라 는 포럼이 열리기도 했다. 이 포럼에서 이상희(李祥羲)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장은 할당제를 「당위(當爲)」차원에서 봐야 한다며 그 근거로▲여성차별이 구조화돼 있는 사회에서의 충격 요법의 필요성▲유엔 여성차별 철폐협약등 여성활용을 적극 권장하는 새로운 국제환경▲여 성(Female).감성(Feeling).창의성(Fiction)의 3F가 중시되는 정보화시대로의 진입을 들었다.그러나 여성계의 이 모든 행사.구호와 논거(論據)들에 대한 각 정당과 정부의 대응은 마지 못한「성의(誠意)표시」수준이다.
외국의 사정은 어떨까.고용 할당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로는 스웨덴.노르웨이 등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이 높은 북유럽 국가를비롯해 프랑스.독일.미국.캐나다.대만.호주.벨기에 등 20여개국.이들 나라에서는 정당들이 당직자와 공천 후보 를 정할 때 여성의 비율을 당규로 명시하고 있으며 공무원과 정부 산하 위원회의 임명직 위원도 할당 대상이다.
비율은 15~40% 사이.이같은 체계적 노력의 결과 현재 여성 총리가 이끄는 노르웨이는 내각의 44%,의회 의원의 34%,정부위원회 위원의 30%가 여성이다.이에 비해 한국의 여성 정치참여 비율은 국회의원 2%,각료 0.45%,지 방의회의원 1.7%에 불과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역사는 여성들에게 진 빚이 많다』고했다.그렇다면 여성고용할당제는 이같은 누적 채무에 대한 최소한의 변제 방식이기도 하다.
언필칭 세계화 시대,「여성적 특성」이 최대로 활용돼야 할 3F시대에「절반의 실패」를「절반의 진출」로 바꿈으로써「전체의 성공」을 일궈낼 수 있을 여성 고용 할당제는 시대적응을 위한 필수적 기초공사의 하나가 아닐까.
〈심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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