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 CEO들 “지친 내 마음부터 경영해야겠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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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베라 이병훈 사장에게 그것은 색다른 체험이었다. 지인의 권유로 심리 컨설팅을 받은 것이다. 네댓 시간에 걸친 심리검사, 이어진 여덟 차례의 심층 상담. 길지 않은 시간에 이 사장을 속속들이 파악한 전문가는 말했다. “사장님은 직관력이 뛰어납니다. 하지만 이를 과신하기보다는 되도록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안 그래도 임원들과의 의사소통이 미진하다고 느껴온 터였다. 이후 그는 달라졌다. 회의 때마다 논의를 주도하던 그가 어느새 ‘잘 듣는’ 사람이 됐다. 심리 컨설팅의 효과를 톡톡히 본 것이다.

디자인하우스 이영혜 사장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의사로부터 “실행력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유능한 직원도 다그칠 수 있겠다”는 진단을 받았다. 속으로 뜨끔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직원들은 왜 내 말을 못 알아들을까’ 싶어 자주 짜증이 나곤 했었다. 그 뒤 이 사장은 “나와 남은, 잘 하는 일이 다를 뿐”이란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자신감은 커지고 스트레스는 줄었다. 역시 마음을 진단해 본 덕이었다.

경쟁과 스트레스에 지친 최고경영자(CEO)들이 ‘마음 관리’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LG·두산그룹은 물론 풀무원·대웅제약 등 중견기업 CEO들도 심리 상담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았다. 이를 경험한 CEO들은 “임직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경영을 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내 감정과 행동을 미리 예측해 통제할 수 있게 됐다” “이 프로그램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회사와 내게 훨씬 더 유익했을 것”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CEO 대상 심리 솔루션 프로그램을 처음 시작한 마인드프리즘의 정혜신 대표(정신과 전문의)는 “이 일은 CEO 개인의 정신건강뿐 아니라 기업의 심리적 자원을 강화시키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CEO들은 고도의 정신노동을 통해 우리 경제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기업은 이들의 육체건강뿐 아니라 마음의 건강까지도 챙겨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팀장급 이상 중간 간부에게도 심리 컨설팅을 제공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NHN 임원 23명은 지난해 ‘치유적 리더십 솔루션’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심리상담을 먼저 체험한 이해진 창업자가 적극 권유한 때문이었다. 임원들은 각각 심층 심리검사와 상담을 받은 뒤 함께 모여 5시간 토론을 했다. 이 회사의 이석우 부사장은 “사생활을 제외한 각자의 분석 결과와 상담 내용을 공유했다. 막연히 느끼고 있던 서로의 기질과 의사소통 방식을 알 수 있어 유익했다”고 말했다. 덕분에 회의 시간이 짧아지고 서로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도 크게 줄었다고 한다.

‘마음 관리’ 대상을 임직원 전체로 확대한 기업들도 있다. 심리 진단도 정기 건강검진처럼 조직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된 덕분이다. 아예 사내에 직원들의 심리·정신 상담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 기업도 여럿이다. LG CNS는 2006년 9월 사내에 ‘마음쉼터’라는 상담센터를 마련했다. 직원들은 이곳에서 스트레스 상담은 물론 성격·적성 검사도 받는다. 김영수 인사·경영지원부문장은 “정보기술 서비스업의 특성상 외근 직원이 많아 e-메일과 메신저로 온라인 상담도 하고 있다”며 “이미 전체 임직원의 10% 이상이 이용했다”고 말했다. 유한킴벌리도 2002년부터 ‘피톤치드’라는 직원 상담 프로그램을 가동 중이다. 대면 상담은 물론 온라인·전화를 통해 조직 내 인간관계나 가정생활, 재테크 고민까지 함께한다. 회사 측은 “결혼·부부·자녀 관련 상담이 압도적”이라고 전했다. 회사가 사적 문제에까지 관심을 기울이는 건 직원들의 마음 건강이 기업 생산성에도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휴맥스·GS칼텍스·SK텔레콤·삼성전자·LG전자·한국IBM 등도 직원 심리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글=이나리 기자,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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