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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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제2부 불타는 땅 1945(20)세상이 물과 같다면,샘물같은많지 않은 몇 사람 때문에 그 더러움이 씻겨지면서 그렇게 흘러가는 거란다.아마 그 목사님도 그런 분일 거다.세상의 샘물같은.오카 목사를 두고 은례가 했던 말이었다.
아침에 전화를 하면서,평화공원을 다녀와서 뵈러 가겠다는 말을했을 때 오카 목사는,그렇다면 집으로 오실 것 없이 내가 그쪽으로 가지요.조선인 추도비 앞에서 만나지요 하고 말했었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원폭을 가지고 피해자라는 왜곡된 논리로 일본인들은 자신의 심성을 도금해갔지만 그날 그땅에서 무고하게 끌려가 신음하던 조선인들이 함께 죽어갔음을 애도하는 사람은 없었다.망각의 벌레는 사람들의 기억을 파먹고,잘못된 역사는 금박양장으로 꾸며져 갔지만 그 속에서도 조선인들은 사라진채 그때마다 몇 번씩 죽어갔다.
1979년 나가사키 평화공원 밑 폭심지 옆 후미진 자리에 조그마한 추도비가 검은 돌로 세워졌다.「나가사키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였다.원폭으로 죽어간 이름도 없는 조선인을 위해,이름도 없는 일본인이 사죄의 마음으로 세운 추도비였 다.그렇게 해서,그 비석에는 글을 쓴 사람의 이름도,돌을 파 글씨를 새긴사람의 이름도,그것을 세운 사람의 이름도 적혀 있지 않다.오카마사하루 목사가 이끄는「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회」회원들이 뜻을 모아 세운 비석이다 .그 추도비 앞에서 만나자는 오카 목사와의 약속이었다.딸아이가 건네주고 간 종이가방을 잡으며 명조는 아버지의 이름을 한자 한자,씹듯이 불러보았다.윤지상. 아버님.이게 뭔지 아세요.아이가 할머니 드리겠다고 산 선물이에요.박해시대 순교한 26명의 가톨릭 순교자 기념관에 갔다가 딸애가 산 선물이랍니다.
어머님은 늘 말씀하세요.늙어가실수록 행복하시답니다.왜냐하면요.자신은 나이를 드셔도 언제나 젊은 남편하고 살기 때문이랍니다.젊어서 돌아가셨으니,어머님의 기억 속에서 아버님은 젊은 모습그대로 멈춰서 나이를 드실 리가 없다는 거지요.
신혜가 명조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저 아이 뛰어오는 걸 좀 보세요.아버님 손녀입니다.아버님 그렇습니다.어머님 말씀처럼 아버님은 영원히 젊으십니다.그렇게 푸르게 우리들의 핏속을 흘러가고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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