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값 떠받쳐라” 400조원 ‘장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0호 34면

거대 카지노 호텔들이 내뿜는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요즘 이 화려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은 어둡기만 하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떨어진 집값 때문이다. 최근 1년 반 새 집값이 평균 25% 폭락했다.

美 주택시장 안정대책 본격화

“내가 똑똑한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정말 멍청한 놈”이라고 관광호텔 직원인 톰 브래들리(32)는 지역 신문인 라스베이거스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는 카지노산업의 호황과 저금리를 등에 업고 집값이 한창 오르던 2006년 9월 모기지 대출로 집 한 채를 사 임대해 줬다. 그의 셈법은 소박했다. 월 임대료 2600달러를 받아 담보대출 이자 1700달러를 내면 부수입 900달러를 챙길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반 년 정도는 그 계산대로 진행됐다. 하지만 요즘 임대료는 1600달러로 떨어졌고 이자는 2200달러로 치솟았다. 월급에서 600달러가 매달 빠져나가고 있다. 그는 “견디다 못해 집을 내놓았는데 팔리지도 않아 곧 집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한숨을 쉬었다.

주택건설업체 애스토리아 홈도 라스베이거스 집값이 오를 때 재미를 봤지만 지금 회사 장부에는 미분양 주택이 710채나 올라 있다. 지난해 4월에 900채를 완공해 팔고 남은 것이다. 에어컨과 세탁기를 덤으로 주는 마케팅을 벌였지만 소용없어 지난달 말에는 분양가를 25만5000달러에서 20만 달러로 20% 정도 낮췄다. 마케팅 담당인 조프 고먼은 “분양가 인하뿐 아니라 담보 설정비 등 고객이 대출받는 데 드는 비용까지 부담해 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집값이 떨어지니 쇼핑센터뿐 아니라 거리의 차와 사람마저 줄어든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포스트 패닉
요즘 월스트리트는 라스베이거스 분위기와는 딴판이다. 주가가 오르고 금리는 안정적인 흐름을 보이고 있다. 베어스턴스 파산 같은 사태는 더 이상 생기지 않고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지난해 9월 17일 이후 공격적으로 일곱 차례 기준금리를 내리고 금융회사에 수천억 달러를 지원한 결과다. 1년 넘게 끌어온 금융불안이 일단 진정되는 모습이다.

그러나 실물경제는 라스베이거스 분위기와 다를 바 없다. 올 1분기 미 경제(GDP)가 예상치(0.0~0.2%)보다 높은 0.6% 성장했으나 내용을 보면 안도하기 힘들다. 에너지 지출을 뺀 소비는 2001년 경기침체보다 더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올 1분기 성장률이 예상치를 초과하는 데 크게 기여한 재고(증가)는 팔리지 않으면 2분기 이후 생산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지난주 말 ‘성장률 착시’라고 진단했다. 성장률은 예상치 이상이지만 생산·소비 감소에 비춰 “실물 경제는 분명히 침체”라는 것이다.

불타는 뇌관
더욱이 급락하는 집값은 경기 침체의 골을 더 깊게 할 전망이다. 지난주 발표된 케이스-실러 주택지수에 따르면 2월 미 집값은 1년 전보다 12.7% 하락했다. 1월(-10.6%)보다 떨어지는 추세가 더 가파르다. 이에 따라 “미 주택 보유자들의 재산이 2월 한 달 새 5360억 달러가 줄어든 것으로 추산됐다”고 미 자산운용사 노던트러스트는 밝혔다. 이 회사는 “2006년 미국인들이 집값 상승을 근거로 빌려 소비한 돈이 5000억 달러 선인데, 2월 한 달 새 그 근거가 모두 사라져버린 셈”이라고 말했다.

궁지에 몰린 미국인들은 소비를 바짝 줄이거나 아예 집을 포기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지난주 초 지급이 시작된 세금 환급 1500억 달러는 ‘코끼리 비스킷’인 셈이다. 결국 ‘소비 감소→내수기업 순이익 감소→고용 악화→경제 성장률 하락’과 ‘집 포기→가압류 증가→매물 증가→집값 추가 하락→금융회사 손실 증가’라는 ‘이중 악순환’이 우려되고 있다.

사정이 이렇기에 벤 버냉키 FRB 의장은 지난달 30일 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시장이 내심 고대한 ‘최악의 상황은 끝났다’는 신호 대신 “주택시장 위축 심화는 앞으로 몇 분기 동안 경제성장을 제약할 가능성이 크다”는 예측을 내놓았다.

화력 재배치
집값 하락으로 다급해진 미 FRB·정부·의회는 화력(자금)을 일단 한숨 돌린 금융시장에서 주택시장 쪽으로 돌릴 준비를 하고 있다. 현재는 터 다지기(의견수렴·법 제정)가 진행되고 있다. 의회 다수당인 민주당은 미 정부가 출자한 주택담보채권 유동화공사 등을 동원해 3000억~4000억 달러(약 300조~400조원)어치의 연체된 모기지채권을 사들이는 법안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또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재무부가 대출금을 연체한 100만 가구에 직접 돈을 꿔주는 안을 내놓고 있다. 연방주택청(FHA) 등이 주택담보대출을 보증해 주는 대책은 이미 시행 중이다. 대통령 선거에 뛰어든 민주당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 공화당 후보인 존 매케인은 도덕적 해이 등 원칙론보다 다급한 현실을 들어 ‘적극적인 대응’을 지지하고 있다. 버냉키도 현재 논의되고 있는 주택시장 안정대책 방안을 하루라도 빨리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런 워싱턴 분위기로 봐서는 1980년대 말~90년대 초 주택대부조합(S&L)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동원된 돈의 약 2배인 3000억~4000억 달러가 올해 안에 주택시장에 투입될 가능성이 크다. 미 정부 출자기관이 주택담보대출 연체자 가운데 아직 집을 압류당하지 않은 사람의 빚을 금융회사로부터 넘겨받아 금리를 내려주고 만기도 연장해 주는 방안이다. 이 정도 처방이면 더 이상의 집값 하락은 차단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게 전문가들의 조심스러운 관측이다.

미 정부의 공격적인 개입으로 주택시장이 안정되면 미국 경기는 80년대 초처럼 회복했다가 다시 추락하는 이중침체(더블딥)까지는 겪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대신 “91년처럼 미 경제가 4~6분기 동안 침체 국면에서 머문 뒤 회복하는 패턴을 보일 수도 있다”고 투자은행인 리먼 브러더스의 자크 팬들은 말했다.
하지만 미 주택시장이 자생력을 갖춰 회복세로 돌아서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더 이상 떨어지지 않더라도 이미 크게 떨어져 있는 상태라 주택 보유자들의 고통은 해소된 것이 아니다. 이에 따라 소비 위축 등 후폭풍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