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영 박물관 세우는 게 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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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호 05면

문을 열어주는 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고우영 선생이 살아 계시던가’ 착각했다. 고우영의 둘째 아들 성언(39·‘고우영 화실’ 실장)씨는 몸매나 얼굴이 아버지를 빼닮았다.

둘째 아들 고성언씨의 아버지 회고제의

“오죽하면 미국 사는 누나가 서울 왔다가 저를 보고 ‘어머! 아버지’ 했을까요. 우리 집안사람들 머리카락이 원래 직모인데 아버지께서 파마하신 뒤 모두 따라 하는 바람에 곱슬머리가 됐다니까요.”

웃으면 눈초리가 처지는 모습까지 선친을 닮은 성언씨는 가족을 대표해 고우영 만화의 모든 것을 관리하고 있다. 유작의 복간 문제나 TV 드라마 방영 제안, 영화화 제의 등 지난 3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아버지 일에 묻혀 살았다.

지금도 연말께 출간될 단편만화집 마무리, ‘일지매’를 어린이소설로 만드는 작업 등이 그의 손을 기다린다. 성언씨는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죽 아버지 일을 잇고 있다. 고우영의 70~80년대 작품을 재출간할 때 복원과 채색·표지에서 솜씨를 보였다. 일산 ‘고우영 화실’에서 만난 그는 “전시회 준비로 자료를 뒤지고 작품을 보면서 아버지 생각에 푹 빠져 있다”고 했다.

“부모님과 형님들을 어려서 여의신 탓인지 핏줄을 무던히 챙기셨어요. 스물두 살 때 동갑내기 어머니와 결혼하신 뒤 딸 하나, 아들 셋을 키우시며 늘 가족이 최우선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손자들한테는 더할 나위 없는 할아버지셨지요. 아버지 달력에는 가족의 각종 경조사가 빼곡히 적혀 있었고요. e-메일이 없던 시절 축하 인사로 보내신 편지와 팩스 자료가 몇 상자나 되니까요. 가족이 모이면 우스갯소리로 분위기 띄우시고 이것저것 챙기시던 다정다감한 분이셨어요.”

요즘도 어머니 박인희 여사는 “네 아버지가 너보다 더 예쁘셨어. 넌 아버지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며 선친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신다고 전했다. 1972년 1월 1일 ‘임꺽정’ 신문 연재를 시작한 뒤 꼬박 18년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마감에 시달렸지만 가족에게 피곤한 기색 한 번 안 보이고 이겨낸 선친을 성언씨는 ‘작은 거인’이라고 기렸다.

“하루 작업이 끝나면 반주 한잔 하시며 식구들과 밥 먹는 게 낙이자 스트레스 해소법이셨어요. 누가 ‘마감 압박을 어찌 이겨내느냐’고 물으면 ‘이제는 이골이 나서 금방금방 해’ 하시며 빙그레 웃으셨죠. 펜이 안 나가면 뒷짐 지고 방 안을 돌아다니시다가 ‘아, 잡았다’ 하시며 얼른 작업대에 앉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는 선친이 자신의 만화세계를 ‘역사의 수레바퀴’에 빗댔다고 했다. 옛날 얘기를 곱씹으며 현재를 돌아보는 일종의 길 찾기에 비유했다는 것이다. 가끔 혼잣말처럼 “우리 삶이랑 어쩜 이렇게 똑같은지…” 하며 탄식하시던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고도 했다.

“이번 전시회가 만화가 고우영, 또는 동시대의 한국만화를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한국 현대 만화사·작가 연구가 제대로 된 것이 없어요.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자서전을 쓰려고 자료를 모을 때 ‘당신이 쓰면 누가 욕을 하겠느냐. 만화사 정리를 할 수 있도록 뭐든 남기라’는 동료들 격려를 많이 받으셨어요. 결국 못 쓰고 돌아가셨지만….”

성언씨는 “고우영 작품세계를 온전하게 정리한 만화박물관을 세우는 것이 우리 가족의 꿈”이라고 말했다. 누구나 와서 만화의 유연하고 심오한 정신과 힘을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지어 아버지의 혼이 깃들게 하고 싶다는 아들의 바람이 새삼 느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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