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는 입담, 날카로운 풍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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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호 05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한국 만화는 ‘고우영’이라는 탁월한 작가와 함께했다. 그것은 축복이었다. 신문과 잡지 지면을 채우는 그의 펜은 독자를 자유롭게 조율했다. 독자들은 그가 이끄는 대로 웃고, 울고, 분노하고, 즐거워하며 가난하고 암울했던 시대를 견딜 수 있었다.

고우영은 희·비극을 넘나드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유사 이래 모든 이야기꾼이 그러하듯 특정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장르를 넘나들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역사와 인물 이야기를 재미나게 풀어냈다. 사기(史記)와 야담(野談), 열전(列傳)과 기담(奇譚)를 넘나들며 낯선 것을 뒤섞고 흔들어 ‘고우영표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것은 능수능란한 이야기꾼이 거대한 지식의 창고에서 자유자재로 꺼내 풀어내는 시원스러운 방담(放談) 같은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것 같지만 이야기들이 모여 완벽에 가까운 체계를 만든다. 그게 바로 고우영의 만화다.

거리낌 없는 구전 방담과 어디 하나 버릴 데 없는 치밀한 구성과 연출, 난데없이 끼어드는 것 같은 농담 하나도 계산에 의해 배치된 정교하고 과학적인 미학이 함께 공존한다.

고우영은 1954년, 15세의 나이로 첫 데뷔작 『쥐돌이』를 펴낸다. 그리고 58년이 되어 둘째 형 고일영이 ‘추동식’이라는 예명으로 연재하던 ‘짱구박사’를 ‘추동성’이라는 예명으로 이어 그린다. 독자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고우영 만화의 시작이다. 짱구머리에 안경을 쓴 박사의 좌충우돌 우스개 만화인데, 특유한 해학의 고갱이를 볼 수 있다. 60년대 고우영은 잡지는 물론 만화방 만화도 그렸는데, 당시 만화방 만화를 독점하던 합동문화사에 밉보여 퇴출되고 말았다. 한 권씩 전체 작품을 그리던 만화방 만화에서 매 회 연재분을 그려야 하는 신문·잡지 만화로 방향을 튼 계기가 된다.

신문과 잡지에 여러 만화를 발표하던 고우영은 72년 1월 1일 스포츠신문 지면에 ‘임꺽정’ 발표하며 ‘어른들이 보는 만화’와 ‘극화’의 시대를 연다. 극화는 일본에서 시작된 용어지만, 고우영을 통해 할애된 지면을 꼼꼼하게 메우고, 역사와 픽션을 넘나들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한국형 이야기만화로 다시 태어났다.

고우영 이전의 이야기만화들이 주로 해설을 통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면 고우영의 극화는 개성 강한 인물을 내세워 극을 만들어 갔다. 거기에 작가가 1인칭 시점으로 거침없이 개입하는 입담 좋은 해설을 활용해 특유의 유머를, 때론 날카로운 풍자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고우영 극화는 이후 단행본으로 묶일 때마다 심의의 칼날에 난도질당해야만 했다.

고우영이 보여주는 이야기의 재미는 고우영이 다시 해석한 인물의 개성에서 나온다.
‘삼국지’나 ‘초한지’ ‘일지매’ ‘가루지기’ 등 고전을 극화한 극화에서 익숙한 인물의 전형을 조금씩 비틀어 새로운 개성을 부여한다. 도대체 어느 ‘삼국지’에서 주인공 ‘유비’를 ‘쪼다’라고 명명할 수 있단 말인가. ‘쪼다’라는 명쾌한 명명에 숨어 있는, 고우영식 인물화의 힘은 이후 여러 극화에서 빛을 발했다.

‘임꺽정’을 시작으로 ‘수호지’ ‘해동일룡’ ‘꽃네별네’ ‘일지매’ ‘삼국지’ ‘초한지’ ‘가루지기’ ‘홍길동’ ‘서유기’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찾아내 다시 고우영식으로 재조립해 나갔다. 모두가 아는, 한 번은 들어본 이야기는 고유영의 손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어 원전에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어디 그뿐일까. 70~80년대 그가 발표한 어린이 만화 ‘너와 나’ ‘거북바위’ ‘팔비당’ ‘대야망’ ‘80일간의 세계일주’ 등은 어른 만화와 달리 마치 아버지·

할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듯 따뜻한 시선이 듬뿍 담겨 있으며, 93년 중국을 여행한 뒤 다양한 자료를 모아 중국 역사를 알기 쉽게 정리한 ‘십팔사략’은 그야말로 최고의 교양만화다.

우리가 언제 또 이런 작가를 만날 수 있을까. 화려한 펜과 붓이 펼치는 한 폭의 동양화 같은 그림이 주는 맛과, 과거의 이야기를 끌어내 현실을 빗대 풍자하는 특유의 웃음과, 무엇보다 책을 잡으면 놓지 못하게 하는 이야기의 힘을 지닌 그의 만화야말로 한국만화 100년의 빛나는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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