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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시선이 미래를 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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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 얼마 전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고등학교 정문 위에 이런 현수막이 내걸렸다. “예일, 스탠퍼드대 동시 합격….” 그걸 보는 순간 언젠가 경기도 가평의 한 시골 고등학교 정문 위에 걸린 현수막이 떠올랐다. “서울법대 합격….” 두 현수막의 내용은 차이가 있지만 거기 담긴 뜻은 다르지 않다. 서울 강남에서 미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현수막을 내거는 것이나, 시골에서 서울대에 합격했다고 현수막을 다는 것이나 똑같은 심리구조다.

# 뉴욕 타임스는 지난달 27일자 기사에서 아이비리그를 비롯한 미국의 명문대에 학생들을 입학시키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는 한국의 교육현실을 꼬집어 보도한 바 있다. 이 기사에서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한국에서 미국의 명문대 입시를 겨냥해 준비하는 것은 이제 하나의 국가적 강박관념이 됐다”고 말했다.

# 입시의 강박관념도 글로벌화한 셈이다. 예전에는 서울대에 들어가는 것에서 지금은 미 명문대에 들어가는 것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강박관념은 고등학교, 중학교는 물론이고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이르기까지 계열화되면서 거의 전국민화되다시피 했다. 물론 강박관념이라고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그 강박관념에 가까운 교육열 덕에 지난 60년간 대한민국은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여기까지 이만큼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강박관념이 빚어놓은 세태는 이미 우려할 만한 선을 넘은 지 오래다.

# 서울 강남 일대와 양천구 목동 지역에서는 중학교 중간고사 기간이 되면 동네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고 한다. 시험기간 중 학부모들이 외출도 삼가고 집에서 자녀들과 함께 시험 준비를 하느라, 이 일대의 시장 경기까지 바뀐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중간고사 경기(景氣)’라는 신조어가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 주부들이 장보는 시간마저 아까워해 대형 마트의 매출이 10% 정도 줄고, 엄마들의 점심 약속도 줄어 큰 음식점들이 울상인 반면에, 집에서 배달시켜 먹는 자장면이나 피자 가게와 분식점 등이 상대적인 호황을 누린다는 이야기다. 아이들이 공부하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공부하고 경쟁하는 세상이다. 뭔가 뒤바뀐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누가 이 미친 경주를 그치게 할 것인가.

# 나도 7살짜리 늦둥이 딸이 있다. 내 딸아이는 서울 강남에 사는 또래들처럼 영어를 잘하지도 못하고 이제 겨우 한글을 읽는 정도다. 그러나 걱정하진 않는다. 공부에는 뒤질지 몰라도 민들레 씨앗을 입으로 불어 바람에 날리길 좋아하고, 자기 키를 훌쩍 넘겨 빨리 자라는 대나무 죽순을 시샘도 하면서 달팽이와 이야기 나누는 것을 즐길 줄 아는 딸아이에게서 나는 되레 희망을 본다.

# 서울대 나오고 하버드대 나와서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 전부를 보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세상은 훨씬 다채롭고 다양하며 결코 단순방정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능도 IQ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워드 가드너가 밝혀낸 것처럼 언어지능, 논리수학지능, 음악지능, 공간지능, 신체운동지능, 대인지능, 자성지능, 심지어 자연지능도 있다. 모두 잘할 필요도 없다. 뭣 하나라도 똑 부러지게 차이 나게 하면 그것이 최고다.

# 5월이다. 어린이날도 다가온다. 하지만 이 땅의 아이들은 딱하기 그지없다. 부모도 불쌍하다. 입시라는 계열화된 강박관념 속에서 갇혀 모두가 허우적거리며 고통받기 때문이다. 그 어디에도 해결책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이들은 자랄 대상이지 사육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모의 못다 이룬 꿈과 강박관념을 아이에게 전가하지 말자.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보도록 해주자. 그리고 아이가 바라보는 방향을 같이 보도록 노력해 보자. 그 아이의 시선이 결국 미래를 연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