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닮은 그녀가 마음 깊이 들어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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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람 포’는 사춘기 청소년의 필독서로 여겨지는 『데미안』의 이 유명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 소년 할람 포(제이미 벨)가 어른이 되기 위해 파괴해야 하는 세계, 즉 극복해야 하는 대상은 어머니다.

할람은 2년 전 어머니가 익사 사고로 죽은 후 세상과의 끈을 놓는다. 소년이 하는 일이라고는 나무 위 오두막에서 망원경으로 사람들을 훔쳐보는 것과 자물쇠 따는 연습뿐이다. 어머니가 죽기 직전 수면제를 다량 복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아버지의 비서였던 새엄마 베리티(클레어 폴라니)를 의심한다. 그런데 우습게도, 엄마의 죽음에 대해 베리티를 몰아세우던 할람은 순간의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새엄마의 유혹에 넘어간다.

어쩔 수 없이 집을 나와 에든버러로 간 할람. 그곳에서 어머니와 꼭 닮은 여인을 발견한다. 호텔 인사과 직원인 케이트(소피아 마일스)다. 할람은 케이트를 뒤쫓아가 호텔 접시닦이로 취직한다. 그때부터 기묘한 일상이 시작된다.

오두막에서 그랬던 것처럼 소년은 케이트의 집을 엿본다. 지붕 위에 올라가는 위험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소년은 맹목적이다. 자물쇠 따던 실력을 발휘해 집 안에도 들어가 본다. 자연스레 유부남인 호텔 매니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케이트의 사생활도 알게 된다.

성장통을 그린 숱한 영화 중에서 ‘할람 포’가 두드러지는 이유는 트라우마가 돼 버린 어머니(친어머니와 새어머니)의 존재를 또 다른 어머니(연상의 여인)로 극복하게 하는 독창성 덕분이다. 나이 차가 만만치 않게 나는 연하남 할람과 연상녀 케이트의 관계가 발전되는 과정도 꽤 설득력 있다.

할람이 케이트에 대해 갖는 감정이 정상적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과거의 상처받은 자신이 했던 것과 똑같이 연모의 대상을 훔쳐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케이트는 그런 할람의 뒤틀림을 껴안을 수 있는 인물이다. 종류는 다르지만 케이트 역시 상처 입은 영혼이기 때문이다. 가정을 버릴 생각이 손톱만치도 없는 유부남과의 불륜. 그 일그러진 사랑에 지칠 대로 지친 케이트는 정신이상자로 치부할 수도 있는 한 소년의 외로움을 받아들인다.

‘빌리 엘리어트’의 발레 신동 제이미 벨의 연기는 이 기묘하지만 달콤한 로맨스의 완성도를 한 등급 높이는 일등공신이다. 첫 주연작으로부터 7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멋지게 자랐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이 배우는 격정적이면서도 섬세한, 충동적이면서도 연약한 할람을 완벽에 가깝게 연기했다.

지난해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을 받은 OST도 강력 추천. 영화를 보는 내내 무슨 음악인지 궁금해지는 곡으로 가득하다. 영국의 인디레이블 ‘도미노’에 소속된 뮤지션들의 솜씨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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