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국책 연구기관장까지 일괄사표 받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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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총리실이 국책 연구기관장들의 일괄사표를 받아 논란이 일고 있다. 총리실 관계자는 “국토연구원 등 산하 18개 기관장이 사표를 제출했다”며 “일종의 재신임 과정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의 물갈이 인사가 공기업·금융기관에 이어 전문연구기관에까지 확대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쯤되면 아무리 ‘코드 맞추기’라 해도 정도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든다. 정권 차원에서 고위 공직자들의 일괄사표를 받은 것은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 시절 이래 처음이다. 연구기관장까지 코드인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 우선 법으로 보장된 임기를 무시했으니 정부 스스로 법을 어긴 것이다. 더구나 이번 경우 개별적으로 사표를 종용한 게 아니라 개인 의지에 관계없이 일괄사표를 받았다. 불만을 품은 기관장들이 반발하고 나서면 새 정부 이미지가 훼손될 수 있다. 그만둘 의사가 없는 사람에게 사직서를 제출토록 강제하면 무효라는 판례도 있다.

임기 중인 연구기관장 교체는 법은 차치하더라도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국책 연구기관의 생명은 중립성과 전문성이다. 이들이 중립성을 지키지 못하면 정부는 조타수를 잃는 것이다. 기관장의 갑작스러운 교체는 중요한 연구의 맥을 끊을 수도 있다. 이번에 대상이 된 기관들은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통일, 보건, 여성, 환경, 행정, 교통 등 정책지원 분야가 망라돼 있다.

임기제는 보호돼야 한다. 임기제를 둔 이유는 정권에 따라 휘둘리지 말라는 뜻이다. 전 정부의 인사라 해서 임기제까지 무시한 채 무조건 물러나라고 한다면 정부의 영속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안팎으로 자질 문제를 빚는 인물은 케이스별로 솎아낼 수 있다. 다만 그럴 경우에도 분명한 명분을 제시해야 함은 물론이다. 새 정권은 제대로 일을 하기 위해서라도 많은 자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소탐대실하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논공행상을 이유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능력있는 기관장을 갈아치운다면 정책의 연속성은 파괴되고 결국 그 손해는 국민에게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