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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기준도 형평성도 잃은 친일 명단 발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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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라는 민간단체가 어제 ‘친일 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4776명의 명단을 발표해 논란을 빚고 있다. 명단은 2005년 발표한 3090명에 새로 1600여 명을 추가한 것이다. 편찬위는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엄정한 반성을 통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라고 밝히고 있다. 지난날의 역사를 바로 평가하자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사를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일본 작위를 받았거나 나라를 팔아넘겼다거나 하는 명백한 친일은 역사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당시 어쩔 수 없이, 혹은 그것이 현실인 줄 알고 처신한 경우는 역사의 이해라는 관점에서 보아주는 것이 온당하다. 그 시절 불가항력적이고 불가피했던 일까지도 지금의 눈으로 잣대를 들이댈 경우 당사자는 억울하지 않겠는가. 명단에 오른 사람의 대부분은 이미 세상을 떠나 스스로 해명할 기회조차 잃었다.

논란의 초점은 친일 인사를 선정한 기준이다. 편찬위는 ‘일본 제국주의의 국권 침탈, 식민 통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해 우리 민족 또는 타 민족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피해를 끼친 자’라고 밝혔다. 하지만 실제 있어서는 일제 때 ‘판검사, 군수, 장교, 고등문관’을 지낸 사람은 모두 명단에 넣었다. 그러나 업무의 특성과 구체적인 활동 내용을 고려하지 않고 이들을 일률적으로 단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게다가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음악, 미술, 소설 등 부문별로 기준이 달라 과연 형평에 맞는지도 의문이다. 당사자와 그 후손은 명예에 심각한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특히 발표된 인사 가운데 건국 과정과 그 이후에 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공을 세운 분이 많다. 이들을 몽땅 친일로 낙인찍는다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어떻게 유지해 나갈 것인가. 편찬위 주장대로 그것이 ‘학술적 행위’가 되려면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친일 행각이 확인된 경우만 명단에 올렸어야 옳다. 그렇지 않다면 이는 ‘정치적 행위’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