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저주 받을 바람둥이서 ‘반항’의 상징으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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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호 36면

러시아의 대표적 화가 일리야 예피모비치 레핀이 그린 ‘석상의 초대. 돈 후안과 돈나 안나’. 돈 후안이 친구의 연인 돈나 안나를 유혹하고 있다.

대저 서양의 바람둥이에는 두 가지 타입이 있다.
첫째는 카사노바 타입이다. 키 크고 용모 준수한 데다 화려한 화술과 완벽한 매너, 무엇보다 여성에게 기쁨을 주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봉사하는 카사노바는 한마디로 그가 만난 모든 여성을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여인과 사랑을 나누었지만, 적어도 한 여자를 만나는 동안에는 그녀에게 충실했다. 그는 어떤 여인에게서도 사랑할 만한 점을 찾아냈고, “탈선이라는 생의 강렬한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그러므로 그 자신이 여인들로부터 사랑받았고, 또 그가 떠난 뒤에도 원망을 사지 않았다.

티르소 데몰리나 『돈 후안, 세비야의 난봉꾼과 석상의 초대』

둘째는 돈 후안 타입이다. 실존 인물인 카사노바와 달리 돈 후안은 17세기에 티르소 데몰리나라는 신부 출신의 스페인 작가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인데, 그 역시 화술이 뛰어나고 멋을 아는 귀족으로서 여자를 유혹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가 사랑을 나눈 여자는 나폴리의 공작 부인에서부터 스페인 바닷가 마을의 젊은 어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그야말로 국적과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만나는 여성을 결코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그가 목표로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정복’일 뿐이다. 스스로 말하듯이 그에게 가장 큰 기쁨은 “한 여인을 우롱하여 명예를 빼앗아버리고선 그녀를 버리는 일”이며, 이를 위해 하인에게 미리 도망갈때 쓸 말을 준비시켜 놓을 정도로 치밀하게 행동했다. 그러니 그에게 우롱당한 여성들이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한마디로 그는 천벌 받아 마땅한 악당에 속한다.

작품은 가면을 쓴 돈 후안이 막 옥타비오 공작의 약혼녀인 이사벨라를 농락한 후 이별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사벨라는 지금껏 그가 자신의 약혼자인 줄 알고 몸을 허락한 것인데 뒤늦게 딴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소리를 지른다. 현장에 도착한 나폴리 왕은 스페인 대사인 돈 페드로에게 이 곤란한 사태의 해결을 맡기는데, 돈 페드로는 범인이 하필 자기 조카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도주시킨 다음 왕에게는 이사벨라가 자기 약혼자인 옥타비오 공작을 몰래 만난 것이라고 거짓 보고를 한다.

이사벨라도 난처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남몰래 만난 사람이 옥타비오 공작이 맞다고 거짓말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창졸간에 왕의 명령으로 체포될 위험에 빠진 옥타비오 공작은 그 나름대로 힘을 써 이 상황을 피하고 스페인으로 도주한다.

이 첫 번째 사건만 보아도 이 사회가 어떤 상황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이곳에서는 한마디로 모든 인간이 총체적으로 부패해 있으며, 국왕으로부터 귀족,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도덕 질서가 완전히 무너져 있다. 돈 후안은 단지 그 가운데 최악의 인간일 뿐이다.

스페인으로 도주한 돈 후안은 계속 같은 악행을 반복한다. 타고 가던 배가 난파하여 그는 어느 바닷가에 기절한 채 파도에 떠밀려 온다. 이 어촌에는 뭇 남성의 구애를 거절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 아리따운 젊은 어부 티스베아가 살았는데 마침 그녀가 돈 후안을 살려낸다. 돈 후안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 보니 여자의 품에 안겨 있지 않은가.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돈 후안이 아니다. 죽을 뻔했다가 겨우 살아나자마자 그는 곧바로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이때 그가 하는 말은 바람둥이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한번 눈여겨볼 만한 구절이다.

지옥 같은 바다에서 나와
당신의 맑은 하늘로 나왔습니다.
바다에서 죽을 뻔한 목숨,
오늘부터는 사랑으로 죽을 것입니다.
이렇게 달콤한 아픔을
당신으로 인해 알게 되었으니
사랑의 아픔에서 도망갈 수 있도록
저를 바다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저는 물에 젖어 왔으나
불이 붙었으니
그건 당신의 불 때문이었습니다.

티스베아가 “숨도 못 쉬고 오시느라/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터인데/ 그 힘든 일을 겪고도/ 어쩌면 이다지도 말씀을 잘하시는지요” 하고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물론 돈 후안은 이 자존심 강한 어부 여인도 범한 다음 그녀의 말까지 훔쳐 타고 달아나버린다.

돈 후안의 행태는 갈수록 더 나빠진다. 세비야로 가서는 교묘한 속임수를 써 옛 친구 라모타 후작의 여자친구를 정복하려고 하는데, 이때에는 여성 편력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흉악 범죄까지 저지르고 만다. 여자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그녀의 아버지 돈 곤살로를 칼로 찔러 살해하고, 게다가 뒤늦게 나타난 친구가 그 대신 살인죄를 뒤집어쓰게 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아버지와 국왕의 엄명으로 유배를 가던 중 어느 마을에서 결혼식이 거행되는 것을 보자 거짓말과 협박을 적당히 섞어 신부를 범하고는 도망간다. 그의 사악한 행동을 목도한 하인이 보다 못해 그에게 천벌을 경고하기에 이르지만 돈 후안은 전혀 뉘우침이 없다. 그가 늘 하는 말은 “아직 시간은 많다네”이다.

여기까지가 돈 후안이 난봉을 피우는 과정이라면 극의 종반부는 그가 신의 처벌을 받는 과정이다. 그렇지 않아도 어지러운 이 세상을 돈 후안이 욕정의 불로 더욱 어지럽혀 놓았으니, 지옥불의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날 그는 예전에 그가 칼로 죽인 돈 곤살로의 무덤 옆을 지나게 되었는데, 거기에 돈 곤살로의 석상이 서 있고 그 비문에 “여기 가장 충성스러운 기사가 어느 배신자를 향한 신의 복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새겨진 것을 보게 된다.

돈 후안은 석상의 수염을 잡아당기면서 조롱하고 석상에게 저녁 식사에 오라고 초대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가 하인과 저녁 식사를 하는데 진짜로 석상이 찾아온 것이다! 그러고는 다음날 저녁에는 자기가 식사에 초대하겠다고 제안하는데, 돈 후안은 공포에 떨면서도 명예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스페인 기사답게 용감하게 이를 수락한다. 다음날 찾아온 돈 후안에게 돈 곤살로의 석상은 악수를 청하는데, 석상의 손을 잡자 돈 후안의 몸에 불이 붙는다. 그는 회개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지만 석상은 이를 거부하고 결국 돈 후안은 지옥으로 떨어진다. 평생 남을 속인 자가 최후에 석상에 속임을 당한 것이다.

석상은 신의 대리인을 가리킨다. 세상의 질서가 어지럽혀져 있고, 사랑은 다만 거짓된 말장난과 욕정으로 타락해 있지만 이 세상의 왕들은 그것을 바로잡을 힘이 없다. 최후에 질서를 복구하는 것은 오직 신의 힘뿐이라는 것이 저자의 메시지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작품은 당시 타락한 사회에 대한 종교적 경고의 의미를 띤다.
그러나 사람들이 저자의 원래 의도를 그대로 따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많은 독자는 돈 후안을 비난하는 대신 오히려 멋진 인간으로 부러워할 가능성이 있다. 그뿐인가. 돈 후안은 신의 뜻에 도전하면서까지 자신의 욕망과 자유를 옹호하는 서구 개인주의의 영웅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다분하다. 돈 후안은 후대의 작가들에 의해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모차르트는 『돈 조반니』에서 돈 후안을 무신론자로, 바이런은 도피자로, 푸시킨은 사랑에 빠진 인간으로, 버나드 쇼는 여성 혐오자로 그렸는가 하면 스페인의 19세기 작가 소리야는 마지막 순간에 그가 사랑하는 여성에 의해 종교적 구원을 받는 것으로 그렸다. 돈 후안은 천벌 받아 마땅한 난봉꾼으로 시작해 시대의 구속을 거부하는 반항아로 변신하며 불멸의 신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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