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즈비언판 ‘섹스 앤 더 시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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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호 09면

과속으로 붙들린 남자에게 경관이 이유를 물었다. 천생 자신의 여자라고 생각했던 약혼녀가 웬 여자와 엉겨 붙어 있는 광경을 목격해 충격을 받았다는 운전자의 변명을 듣고 경관이 말한다. 두 명의 여자가 사랑을 나누고 있는 화면에 남자가 등장하고, 그때 남자들은 셋이 본격적 장면을 연출하는 포르노를 상상하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남자들은 판타지에서 깨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문은실의 미드열전 <20> 엘워드

미국의 유료 케이블 채널 쇼타임에서 5년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엘워드’는 TV 역사상 가장 대중적이고 발랄한 터치로 레즈비언의 세계를 구성해 낸 드라마다.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따라 부르려고 노력했을 주제가 가사처럼, ‘엘워드’는 “웃고 떠들고 사랑하고 숨쉬고 싸우고 섹스하고 울고 마시고 쓰고 이기고 지고 배신하고 키스하고 생각하고 꿈꾸며” 자신들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그녀들, 즉 레즈비언의 거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소재는 물론이거니와, 노출 수위나 언어 선택, 소재의 자극성 등은 TV 등급에 있어서 역사상 최고 수준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녀의 구분 없이 이 드라마가 포르노가 아닌 정상적(?) 수준의 드라마로 읽힐 수 있는 이유는 이만한 소재를 이 정도로 유쾌하고 감동적이면서도 깔끔하게 다듬어낸 작품의 재미에 있다. 전 세계 여자들의 꿈과 사랑과 우정을 대변하며 2004년에 종영한 인기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드라마가 매년 지겨울 정도로 등장하지만, 어쩌면 그 적자의 자리는 이미 결정이 났다고도 할 수 있다.

아니, ‘엘워드’는 팬들의 두터운 사랑과 호응으로 그 자리를 뛰어넘어 성숙해 가는 단계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성적 방향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을 수 있는 세계를 자연스럽게 비춰 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주인공들의 입을 빌리면 이성애자들끼리보다 여자들끼리라 오히려 더 울고 불고 구질구질하고 넌더리 나는 상황이 차고 넘치는 것도 이 드라마는 열심히 보여준다. ‘엘워드’는 미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소리 소문 없이 알려진 최고의 추천작 가운데 하나이다.
전문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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