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VS 영화] 뻔할 뻔자 사랑도 즐겁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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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믿지 마세요'엔 별 기대가 없었다. 한국 코미디 영화라면 아무리 꼬드겨도 "유치해서 안 보겠다"던 아들이 웬일인지 이걸 보자고 조르지 않았더라면, 그 아들의 영화 보는 선구안이 최근 거의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직구만 골라 안타를 친다는 걸 무시하려 했다면, 사실 이 영화는 그저 비디오로나 한번 봐줬을 거다. '그녀…'로 시작하는 제목이 얼마 전 욕먹었던 코미디랑 비슷한 데다, 젊은 남녀들을 내세운 한국 코믹 멜로들이 거기서 거기 잖아? 사실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장르영화가 로맨틱 코미디지만 질적인 도약은 못하는 것 같아.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의, 왠지 고급 레스토랑에서 제대로 서비스 받고 나온 듯한 매끈한 느낌이 나오지 않잖아. 아들도 뭐'위풍당당 그녀'에서 눈에 익었던 강동원이 나온 영화라니까 그런거겠지. 그 드라마 때 나 역시 사투리 쓰는 왕자님의 출현에 눈이 번쩍 뜨였고, 그 경험에 비추어 영화가 엉성한 연기로 얼룩지지 않을 거라는 정도의 기대는 있었다.

하지만 김하늘이 '청순가련'형 사기로 가석방 심사관들을 속여 언니의 결혼식장으로 향하는 초반에도 '뻔한 영화'에 대한 의구심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흠,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김하늘의 코믹캐릭터를 과장한 거구나. 거기에 기차 속에서 강동원의 결혼반지와 김하늘의 가방이 바뀌어 김하늘이 강동원의 용강 시골집으로 찾아나선다는 초반설정에서 나의 인내심은 영화에 일찌감치 사형선고를 내릴까 말까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아니, 남의 결혼반지를 굳이 돌려 주려고 애쓰는 이유가 뭐야. 사기 전과범이. 가방 안에 뭐 대단한 물건이 들어있다고 찾아야 하며. 둘이 그렇게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거지? 역시 뻔하군 뻔해.

그런데, 마을입구에서 우연히 남자의 가족들에게 "약혼녀"라고 뻥쳤던 김하늘이 진짜 약혼녀로 오해받게 되면서, 그런데 대가족이 유난히 따뜻한 사람들이며 여자를 진심으로 반기는 걸 보면서, 가족이 늘 아쉬웠던 김하늘이 여기에 은근 슬쩍 끌리게 되면서 나는 슬슬 이 주인공이 어떻게 이 상황을 몰고 갈지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가만가만, 이거 어디서 들었던 이야기잖아? 따뜻한 대가족과 남자의 약혼녀로 오해받는다? 그렇지, '당신이 잠든 사이에'야. 기차역에서 일하던 샌드라 블럭이 철로에 쓰러진 남자를 구하고 혼수상태인 그의 약혼녀로 오해받잖아. "드디어 참한 아가씨를 골랐네요"라며 기뻐하는 부모님과 남자의 여동생. '그녀를…'에서는 치매를, '당신이…'에서는 심장병을 앓고 있는 할머니 때문에 거짓말을 돌이킬 수 없는 주인공. 거기에 "임신했대요"라는 소문까지 여자를 꽉 옭아매는, 그런데 남자에게는 천생배필임이 의심되는 약혼녀들이 있고…. 그러니 여자 주인공들의 심정은 한마디로 "정말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인 두 영화. 오해는 마시라. 나는 표절이니 하며 시비걸겠다는 생각은 없으니. 혹 최악의 경우로 이 영화가 '당신이…'를 베끼겠다는 의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비슷한 건 딱 여기까지만이다. 그것조차 '로맨틱 코미디에 따뜻한 가족들의 이야기를 넣는다'는 정도의 영감을 받은 걸로 생각하면 그만이다. 이후부터 두 영화의 이야기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니까.

한데, 영화는 중간으로 가면서 서서히 나를 낚아채고 있었다. 주인공을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머무르게 하는 상황과, 고향마을에 등장한 뒤 약혼녀의 정체를 대번에 밝힐 것 같았던 강동원이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더 여자에게 옭아 매이는 아이러니의 연속을 지켜보는 일은 행선지를 정확히 알고 쾌속질주하는 버스에 탄 기분이었다. 특히 단순한 코믹 에피소드의 연속으로 순간의 웃음을 유발하는 데 급급했던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는 초반부터 잘 뿌려놓은 웃음의 씨앗들을 차곡차곡 거두어 들이면서 '구조적'으로 웃겨준다는 것이었다. 아, 이것이 시나리오 책에서 강조하던 '심어두기(Plant)'와 '거두기(Payoff)'구나. 대표적인 장면이 김하늘이 마을 어귀 미장원에서 아줌마들의 수다로 들었던 강동원에 대한 정보들을 나중에 약혼녀임을 증명할 때 써먹는 장면.'당신이…'에서도 샌드라 블럭이 우연히 들었던 "저이는 고환이 하나밖에 없어요"라는 정보로 의심하던 가족들의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들지. '그녀를…'은 이런 장치들이 초반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이어짐으로써 마치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맞물려 돌아가는 것 같았다.

결국 영화에 흠뻑 빠진 나는 깔깔거리다가, 사랑을 고백할 땐 가슴 설레다가 막판 '고추총각 선발 대회'에서 '여자 여자 여자'를 부르는 강동원과 능청스럽게 춤춰대는 김하늘을 보면서는 엉덩이가 들썩일 뻔했다. 그리고 여기서 '당신이 잠든 사이에'는 나로부터 판정패를 당하고 만다. 그 영화는 이렇게 신나게 가슴을 뻥 뚫어주는 구석이 없었잖아. 어차피 고추 총각 선발대회가 억지스러운 설정이었다면 '당신이…'에서는 남자와의 결혼식에서 돌연 동생을 좋아한다고 선언하는 장면이 그랬는데. 예정된 결말로 가는 거라면 좀더 이렇게 다이내믹한 장면 속에서 사랑을 확신하게 만드는 게 좋지. 그리고 애초 주인공의 캐릭터들도 샌드라 블럭이 그저 착하기만 한 여자여서 거짓말을 한다는 걸 관객이 거부감을 느끼게 하기보단 김하늘처럼 사기꾼으로 만든 게 더 나았던 것 같아.

그래. 이런 게 기본기를 보여주는 영화지. 그다지 새롭진 않지만 예정된 '뻔함'에 즐겁게 동참하게 만드는 영화. 영화를 본 뒤 난 주위에 이러고 다닌다. "야 우리 영화 이제 할리우드 수준이야" "응? 너 '태극기'봤구나" "아니 '그녀를 믿지 마세요'라고 로맨틱 코미딘데…."

이윤정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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