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맛깔난 초고추장 연구 중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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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모르는 게 약이라고 알면 못 먹어요.” 안효주씨는 횟집에서 막 썰어준 생선회는 “입 안에서 빙글빙글 돌아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까다로운 입맛 때문에 맛있는 음식이 별로 없다.”는 그는 산나물이나 된장찌개를 즐긴다고 했다. [사진=최승식 기자]

“유명한 사람도 아닌데 부담돼 죽갔네요.”

짧게 올려 친 머리에 다부진 체격,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 억양이 묻어나는 말투의 50대 남자가 입을 뗐다. 젊은 시절 전국 아마복싱대회에서 라이트급 준결승까지 올랐다더니, 평상복 차림인 ‘한국의 초밥왕’은 체육관 관장 같은 모습이었다.

일본 만화 『미스터 초밥왕』에서 수삼초밥을 만든 한국인 요리사의 실제 모델 안효주(50)씨. 그가 요리 인생을 되돌아보는 책 『안효주, 손끝으로 세상과 소통하다』(전나무숲)를 냈다.

그가 운영하는 서울 청담동 ‘스시효’를 찾았다.

“초밥을 만드는 건 섬세한 과정이에요. 손가락을 어떻게 놀리느냐에 따라 넓적하거나 홀쭉해지니까 강약을 잘 조절해야죠. 동시에 민첩해야 합니다. 손님께 리듬 있는 칼질과 동작을 보여드려야 하거든요. 운동신경이 발달한 사람이 요리도 잘할 수밖에 없어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던 무하마드 알리의 말은 권투선수 출신 초밥장에게도 유효한가 보다. 빈틈을 노려 치고 빠지던 민첩성으로 그는 눈깜짝할 사이 초밥 한 알을 쥐어낸다. 그리고 그 속에 밥톨 350개, 달인의 경지다.

‘아침마다 칼꽂이에 있는 여섯 자루 중에서 마음에 울림이 있는 것을 골라 쓴다’ ‘도달하지 못한 경지가 있다. 밥알을 들어 눈앞에 댔을 때 그 사이로 하늘이 보이는 것이다.’

뭉친 밥 위에 생선 한 점. 겉보기엔 모두 비슷한 초밥이지만, 빛난다고 다 황금은 아니라고 그는 어떤 경지를 말한다.

“딱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이 있어요. 저도 7~8년 전에 번쩍 하는 순간이 있었어요. 팔딱팔딱 뛰는 생선을 잡아먹는 게 제일 좋은 줄 알았다가 그제야 숙성 공부를 시작했죠. 그런데 숙성이라고 다 좋은 것도 아니에요. 종류·산지·상태 따라 다 다르니 야단치며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예요.”

스스로는 “무지했다”고 하지만 그는 1998년 신라호텔 조리과장 시절 ‘초밥 명장’ 칭호를 받았다. 2004년 ‘스시효’를 열었을 때 호텔 손님의 80%가 옮겨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17년쯤 됐을 때 자신감이 확 붙어서 ‘아, 이제 다 왔구나’싶었는데 20년을 넘기니 또 어려워요. 죽을 때까지 해도 모를 것 같아요. 예전 인터뷰를 볼 때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한 말들이 부끄럽습니다.”

20년의 세월은 초밥을 쥐는 손재주에 마음을 얹어줬다. ‘안효주 초밥’을 고집하는 손님이 늘었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과 최태원 SK 회장도 단골이다. “최 회장님 아들이 식도락가예요. ‘미스터 초밥왕’을 열심히 봤는지 일본 스시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대요.”

일본에서 나고 자라 일본인 입맛을 가진 박 회장은 반드시 “안 사장 계신가” 전화한 뒤에 찾는다. “쉬려고 했는데 예약이 있으면 나와야 해서 피곤하지만(웃음) 그 덕에 보람 있어요. 돌아가실 때까지 제가 해 드려야죠.”

그는 맛보다 정성을 앞에 둔다. 아무리 좋은 생선을 써도 마음이 깃들지 않으면 맛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으로 그는 스시다이를 사이에 두고 손님과 마음을 주고받았다. ‘스시효’를 열때 매일유업 김정완 부회장이 선뜻 거액을 지원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호텔에 있을 때 가끔 ‘돈 댈 테니 식당 해보라’고 하시는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몰랐어요. 친구를 소개해 드린다고 하면 ‘돈 벌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안 차장 아니면 안 합니다’그러셨죠. 그러다 나이 먹으면서 고민 끝에 찾아갔어요. 바로 ‘계좌번호 알려 달라’며 4억을 넣어주셨더라고요.”

어찌 될지 모르니 도장 찍고 공증받으라고들 했지만 계약서 한 장 없다. 김 부회장은 음식점 경영에 간섭하지 않고, 안씨는 더 좋은 조건으로 함께 하자는 사람들을 전부 마다한다.

‘스시효’는 올 가을 네 번째 지점을 연다. 규모가 커져도 ‘안효주의 맛’이 유지될까.

“검증 안 된 사람은 지점에 안 내보내죠. 돈은 지금도 얼마든지 벌 수 있어요. 프랜차이즈 설명회만 하면 줄 설 텐데….”

자신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끊임없는 공부다. 그는 여전히 “가르쳐준다면 냄비라도 닦겠다”는 자세다.

“초고추장을 어떻게 하면 더 맛있게 만들까 연구하고 있어요. 부산에 명물횟집이라고 있는데 초고추장이 일품이라네요. 초밥이 전부는 아니거든요. 회덮밥도 가끔 먹으면 맛있어요. 오늘 식구들 메뉴가 회덮밥인데 들고 가세요.”

오후 4시 반, 저녁 영업에 앞서 이른 식사를 하는 시간이다. 막간에 초밥 쥐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가 새하얀 조리복으로 갈아입었다. 온 정신을 칼끝에 집중해 정교하게 생선을 바르던 사진 속 모습 그대로다. 그의 오른 손이 둥근 나무통에서 밥을 슬쩍 쥐고, 왼손이 생선을 잡아 밥으로 다가들었다. 고추냉이가 스윽 발라졌고 순식간에 붉은 살점에 윤기 있는 하얀 지방이 꽃처럼 핀 참치뱃살 초밥 한 알. 이와 혀 사이에서 밥알이 부서지듯 흩어지고 참치가 사르르 녹아들었다.

“평탄하기만 한 인생이 재미없는 것처럼 맛에도 파노라마가 필요해요. 담백한 것부터 진한 맛으로 옮기면서 비릿한 맛, 담백한 맛, 밋밋한 맛을 오르내리세요. 초밥을 맛있게 먹는 법입니다.”

글=홍주희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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