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꾸는 ‘소녀의 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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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 04면

키 11.5인치(약 29㎝), 금발머리, 파란 눈. 1959년 태어났다. 64년 대학에 입학했고, 65년 우주비행사가 됐다. 86년 여성 사업가, 88년 의사, 90년 비행기 조종사를 거쳐, 92년엔 대통령에 입후보했다. 이 밖에도 올림픽 단거리 선수, 에어로빅 강사, 월드컵 축구선수, 뉴스 앵커, 응급구조대원 등 80개 남짓한 직업을 가졌다. 63년엔 가발을 바꿔 쓸 수 있게 됐고, 64년엔 새로운 소재 덕에 다리와 팔을 구부릴 수 있게 됐다.

67년엔 허리를 돌릴 수 있게 됐으며 68년엔 말문을 텄다. 말 ‘댄서’(71년)를 포함해 40종 이상의 애완동물을 지녔고, 지프와 트레일러 등 다양한 탈것을 소유했다. 남자 친구 이름은 켄(61년). 여자 친구 미지와 여동생 스키퍼, 켄의 친구 앨렌과 사촌 프랭키, 남동생 투디와 토드 등 가족·친구 관계도 폭넓다. 내년 쉰 살을 바라보는 지금도 ‘액면상으론’ 틴에이저다. 지구촌에서 1초당 3개씩 팔리는 ‘플라스틱 여신’, 그녀의 이름은 바비(Barbie)다.

디자이너 시리즈 중 ‘림 아크라 신부’(2007)

찬양·비난 동시에 받는 문화 아이콘
오늘날 “바비 인형 같다”는 이상적인 몸매의 여성을 치켜주는 최상의 관용 어구다. 밀로의 비너스처럼, 바비는 실재하지 않으면서 현대의 미의식을 지배해 온 가장 영향력 있는 캐릭터다.

77년 미국 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인정받아 200년 후 열어볼 타임캡슐에 포함되는 영예를 안았고, 85년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이 그녀에게 그림을 헌정하기도 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업적 중 하나로 꼽히는 캔자스의 아이젠하워 도서관에도 바비가 자리 잡고 있다. 팔로알토에 있는 ‘바비 명예의 전당’에는 2만 개 이상의 바비 인형이 전시돼 있다.

페이퍼 데님&클로스의 바비 데님 컬렉션(왼쪽)과

하지만 5피트9인치(약 1m70㎝)의 성인 여성을 6분의 1로 축소한 이 인형은 바로 그 몸매 때문에 격렬한 비난을 샀다. 인간으로 환산하면 가슴 36, 허리 18, 엉덩이 33인치라는 불가능한 비례에다 지방 부족이 17~22%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어서다. 신디 잭슨이란 미국 여성은 바비처럼 되기 위해 수십 번의 전신 성형수술을 마다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패러디한 테러리스트 그룹 ‘바비해방기구(BLO)’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소설·신화·전설·TV·영화에 나온 101가지 인기 캐릭터를 분석한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캐릭터 인물 사전』(원제 The 101 most influential people who never lived)은 바비를 가리켜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 중 바비 인형만큼 상업적인 문화와 물질, 젊음과 아름다움, 날씬함에 대한 집착을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고 썼다.

‘어른들의 세계’ 역할 놀이로 성공
그럼에도 바비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인형이다. 지금까지 150개 나라에서 10억 개 이상 팔려, 이들의 머리와 발을 맞대 일렬로 놓으면 지구를 네 바퀴 돌 수 있다고 한다. 3살에서 10살 사이의 미국 소녀들은 평균 10개의 바비를 가졌다. 마텔(Mattel)사가 바비를 통해 벌어들이는 한 해 수입은 97년 10억 달러를 넘어섰다.

바비의 성공은 아이들의 장난감을 ‘역할 놀이’로 대체시킨 데 있다. 마텔사의 공동 설립자인 루스 핸들러(Ruth Handler)는 어린 딸 바버라가 갖고 놀던 종이 인형을 보고 여자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의 자기 모습을 보여주는 인형이라고 생각했다. 59년 뉴욕 완구박람회에 첫선을 보일 때부터 바비는 성숙한 몸매의 성인 여성이었고, 이는 아기 모양 위주였던 인형 시장에 혁신을 불러왔다. 소녀들은 드레스와 하이힐, 파티라는 ‘어른들의 세계’를 바비에게서 찾았다.

줄무늬 수영복에 묶은 머리(ponytail)를 하고 나타났던 바비는 곧 다양한 직업의 세계를 보여줬다. 그것은 옷으로 표현됐다. 소녀라면 입고 싶은 옷이 한 해 100벌씩 쏟아졌고, 소녀는 형형색색의 인형 옷을 갈아입히며 자신의 미래를 다채롭게 상상했다. ‘숨은 손’은 물론 마텔사의 디자인 개발부다. 그들은 소녀들의 생각과 라이프스타일을 분석하고 그 모습을 바비에 담아 새 유행을 만들었다. 오드리 헵번, 비틀스, 재클린 케네디의 패션은 바비를 통해 소녀들에게 전수됐다.

공격적 마케팅과 컬렉터 라인 전략
마텔사는 세태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왔다. 초창기 바비는 눈을 내리깐 다소곳한 모습이었지만 67년부터 정면을 바라봤고 77년 씩씩하게 웃는 표정으로 변했다. 백인 일색의 미(美) 기준이라는 비판을 감안해 80년대 들어 흑인과 히스패닉 등 인터내셔널 바비 시리즈도 나왔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88년엔 한복 입은 바비가 처음 등장하기도 했다. 바비는 현재 45개 남짓한 국적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97년 5월엔 분홍색 휠체어에 앉은 장애인 모델(‘share a smile Becky’)이 출시되기도 했다.

마텔사는 또 성인이 된 세대의 요구에도 부응했다. 86년 출시된 ‘블루 랩소디’는 처음으로 도자기 소재를 도입하고 옷차림도 훨씬 고급화했다. 어린 시절 장난감은 키덜트(kid+adult)의 애장품으로 변신했다. 고가 컬렉터 라인이 활성화되면서 일반 소비자를 겨냥한 ‘핑크 박스’(5만 개 이상 생산)와 별도로 플래티넘(1000개 미만), 골드(2만5000개 미만), 실버(5만개 미만) 등 생산 라벨이 세분화됐다.

이와 함께 빈티지 컬렉팅 열풍도 가속화됐다. 59년도산 최초의 바비는 발매 당시 3달러에 팔렸지만, 현재는 경매사이트에서 1만 달러 이상에 팔리기도 한다. 특정 연도에 제조된 바비는 500~5000달러에 거래된다. 한정 생산되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 바비일수록 소장 가치가 높아 컬렉터들이 몰린다.

디지털 시대 맞춰 다양한 변화
마텔사는 66년 토킹 바비를 내놨다. 끈을 잡아당기면 “패션 모델이 되고 싶어요” 등 여섯 가지 문장을 말할 수 있었다. 당시로선 최첨단이었지만,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이 정도 기술은 구식으로 여겨질 정도다.

최근 바비는 사이버 인형놀이와 실제 구매를 연결시키는 데까지 나아갔다. 96년 출시된 ‘바비 패션 디자이너’ CD롬은 사용자가 직접 옷을 디자인할 수 있게 해준다. 만든 옷을 바비에게 입힐 수 있게 종이 섬유로 된 옷감도 제공한다. 이 CD롬은 휴가 시즌 미국 소프트웨어 판매량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바비 헤어 스타일러’ ‘바비 스토리 꾸미기’ 등 추가 제품도 나왔다.

마텔사는 소비자가 인터넷에 들어가 원하는 대로 바비를 만들고 주문할 수 있는 ‘마이 디자인’이라는 프로그램도 개발했다. 옷 종류와 액세서리, 피부, 눈의 색, 머리카락 색, 머리 모양 등 여섯 가지 변수로 1만4000여 가지 다른 모습을 한 바비가 가능하다. 여기에 이름·생일·취미·특기 같은 특성까지 선택하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바비가 가능하다. 직접 만든 옷을 입히거나 나만의 화장법을 해주던 구세대의 인형놀이를 뛰어넘는 차원인 것이다.

의류·화장품·공연 등 라이선스 활발
새 밀레니엄의 딸들에게 바비는 ‘인형 그 이상’이다. 예전엔 소녀들이 바비를 통해 어른의 세계를 꿈꾸었다면, 21세기엔 성인들이 바비를 통해 소녀의 세계를 꿈꾼다.
마텔사는 의류·화장품·주얼리·엔터테인먼트 방면으로 꾸준히 라이선스 사업을 확장해 왔다. 바비는 구찌, 안나수이, 막스 마라 등 100여 개의 디자이너 브랜드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초창기 머리 묶은 바비를 형상화한 ‘포니테일’ 로고뿐 아니라 매 시즌 조금씩 바뀌는 스타일 가이드 역시 주요한 디자인 패턴으로 사용된다.

바비는 이제 세대 간의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어린아이들은 바비 인형을 갖고 놀고, 그보다 조금 위 세대는 바비 화장품을 쓰고 MP3 플레이어를 듣는다. 엄마와 아이가 나란히 바비 애니메이션을 감상하기도 한다. 세대를 뛰어넘는 바비의 힘은 물론 마텔사의 다각화된 마케팅 전략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 마케팅이 호소하는 감성은 한결같다.

“사람들은 바비의 모습이 비현실적이라고 토를 달지만,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지. 바비의 가치는 바로 그 비현실성에 비례한다는 것을. 그녀는 꿈을 입고 있거든. 이것 말고 뭘 더 입을 필요가 있겠니?”(『내 어릴 적 바비』 스티븐 C 더빈 외 지음).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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