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싶은 이야기.."책펴낸 金대통령 차남 金賢哲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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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차남 김현철(金賢哲)씨는「베일」속에 있었다.그 자신이 金대통령의 집권후부터 거의 칩거상태에 들어갔다. 부친이 정권을 잡자 무수히 주변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은신(隱身)은 다른 부작용을 낳았다.바로「소문」이 그것이었다.어느 때부터인가 그의 영향력에 관한 밑도 끝도 없는 말들이 돌기 시작했다.
주로 인사와 주요정책에 상당한 수준의 간여를 한다는 내용들이었다.그가 피하면 피할수록 소문은 커지면서 그를 따라다녔다.
그렇게 2년반이 지난 지금 그가 갑자기 책을 냈다.『하고 싶은 이야기 듣고 싶은 이야기』라는 제목이다.『틈틈이 정리한 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출판사측이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권유를 해 결심을 했다』는 설 명이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을 둘러싼 소문들에 대해 직접 나서서 해명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길이라는 판단을 내린 때문인 것같기도 하다.
어쨌든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신에 관한 세간의 소문에 대해 해명하고 있다.전병민(田炳旼)씨나 이충범(李忠範)변호사와의 관계,한약업사 문제와 한겨레신문을 상대로 한 송사(訟事)등 그에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던 여러가지「사건」들에 대해 서도 그 경위와 자신의 입장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다음은 요지.
▲한약업사의 선거자금제공시비=『이충범씨의 소개로 한약업사 대표를 만난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내가 각서를 써주었다는 것은 허위다.역시 이충범씨가 주선해 선거때 그린벨트 해제 추진위원회사람들을 만나「여러분이 건의하신 내용을 수용하도 록 노력하겠습니다」라는 메모를 써준 일이 있는데 이것이 엉뚱하게 한약업사들에게「수용하도록 하겠습니다」라는 각서를 써준 것으로 바뀌었다.
李씨가 이 메모를 팩스로 보내주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한약업사들에게 써준 메모로 조작되었다.나는 그 경위를 알지 못하고 李씨가 한약업사단체의 일을 수임하고 있던 것도 몰랐다.어쨌든 메모를 써준 것은 잘못이나 당시에는 한표가 아쉬웠던 상황이다.』 ▲전병민.이충범씨와의 관계=『田씨는 통일민주당시절 田씨와 함께연구소를 운영하던 故이영호(李永鎬)前체육부장관의 소개로 알았다.그뒤 자문 하기는 했지만 유사한 일을 하는 다른 분들도 많았다.이를 두고「동숭동팀」이니,「임팩트코리아」니 하며 대단한 기구로 소문이 난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물론 田씨가 대통령후보의 유세원고를 도맡아 쓰는등 기여를 했고 아이디어가 풍부해 부친의 신임을 받았으나 정권출범 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나 또한 田씨 를 오래 만나지 못했다.이충범씨도 나의 중대부중 3년 선배지만 92년부터 만났을 뿐이다.
李씨와 관련해서도「영소사이어티그룹」이라고 해서 언론에 많이 알려졌으나 그런식으로 자발적으로 아버님을 돕던 그룹이 수십개는 될 것이다.李씨의 청와 대비서관 발탁에도 간여한 일은 결코 없다.한약업사 파동은 李씨가 잘해보려는 마음이 앞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겨레신문에 대한 고소=『한겨레신문은 한약업사측 관계자가 공금유용 여부를 추궁당한 끝에 내놓은 정치자금제공주장을 사실확인없이 보도했다.
그런뒤 소송을 제기하자 오히려 나를 미행했다.미행하는 기자에게 경고하자 다음에는 두개팀으로 나눠 한팀은 나를 계속 따라다니고 한팀은 박사과정을 수강하는 고려대에서 대기했다.이 문제는원인을 제공한 측에서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는한 소를 취하할 생각이 없다.』 ▲金대통령과의 대화=『가족이 모이는 일요일,또는주중에도 가끔 청와대에 들어가 대화를 나누며 가족과 건강,일상생활 이야기를 한다.이때 세간의 여론을 전하기도 하지만 부자간에 할 수 있는 대화이상은 아니다.이를 정치적 개념인 「독대 」로 해석해 정책이나 인사에 간여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비약이다.아버님은 야당시절이나 선거 때만큼 내가 필요하지도 않고,내게도 그럴 능력이나 시간이 없다.』 ***증권社 석달 근무▲그동안의 행적=『미국 남가주大에서 경영학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우여곡절 끝에 쌍용증권에 입사했다.야당지도자의 아들이라고 다른데서는 거절당해 입사원서에 아버지 이름 가운데 할아버지의 함자 하나를 빌려 김홍삼(金洪三)이라고 적은 일 도 있다.그러나 곧바로 87년 대통령선거가 있어 석달만에 그만뒀다.그러고는친구들과 봉고로 유세장을 다니며 홍보물을 돌린 것이 시초다.그뒤 88년에「중앙조사연구소」라는 조그마한 여론조사기관을 친구들과 차렸고,3당합당후 간판을「민주사 회연구소」로 바꿔달았다.이연구소는 92년 대통령선거운동 조직에 흡수됐다.이무렵 아버님께드릴 말씀중에 다른 사람이 하기엔 민망한 부분을 내가 떠맡기도했다.93년 가을학기부터 고려대 박사과정에 진학했으나 이때도 접근하는 사람이 많 아 곤혹스러웠다.』 ▲정치입문=『지금까지의활동은 아버님을 도운 것일뿐 정치를 했다고 할 수는 없다.내인생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한 결정을 내리지 않은 상태다.때문에 앞으로 정치를 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장인(金雄世롯데월드사장)문제=『세간에는 장인어른에 대한 말도 없지 않은 모양이다.아버님과는 사돈 이전에 형제같이지내신다.평소에 정치성있는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나 주변에 사람이 모여 엉뚱한 소문으로 발전하는 일이 있는 것 같다.
그럴 때면 솔직하게 세상소문을 알려드리지만 당신이 더 자세히 알고 계신다.』 ***몇몇 秘話도 담아 이밖에도 이 책에는 비화(비話)들도 담겨있다.金대통령의 민자당대표시절 고르바초프 옛소련대통령을 만난 것이 후에 타스통신사장과 부총리를 역임한 이그나텐코 당시「노보예부레미아」시사지 편집장의 우연한 주선 때문이었다는 것과 내각제 각 서파동 당시 金대통령의 주변에서는 대부분 당무복귀를 강력히 건의했음에도 마산행을 결행,노태우(盧泰愚)대통령의 내각제 포기약속을 얻어낸 일이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 金대통령이 자신의 당선을 한 호텔방에서 사돈 김웅세사장.
현철씨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며 확인했다는 내용도 담겨있다.
〈金敎俊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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