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10만리>3.麗江 옥룡설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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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호텔을 잡은 탐사대원들은 휴식할 사이도 없이 로비에서 만난 40대의 입심좋은 나시족 출신 관광 안내원으로부터 여강 북쪽 로구 근처에 사는 모소족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흥미가 바짝 동한 탐사팀은 다음날 모소족 마을을 찾아 나선다.현장에 도착해 확인 해보니 모소족은 과연 기상천외한 풍속을 지키며 살고 있었는데 그것은 여자들이 평생동안 남편없이 사는 것이었다.그러니까 한마을에서 여자는 여자대로,남자 는 남자대로따로 집 짓고 살거나 형제.남매 관계에 있는 가족들만이 동거한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좋아하면 남자는 여자집 방문앞에 모자를 걸어놓고 들어가 여자와 함께 잔다.
과년한 딸이 있는 경우 어머니와 딸 방문 앞에 각각 모자가 걸려있는 수도 있다.모자가 걸려있으면 먼저 온 남자손님이 있다는 표시이므로 다음에 온 남자는 이 모자를 보고 발길을 돌린다고 한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가지만 더 해보면 중국 윈난(雲南)省에사는 이족(夷族)중에는 아직도 기묘한 풍속을 지키며 사는 무리가 있다.
이 종족은 여자 형제가 여럿일때 이 형제 모두가 한 남자에게시집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더욱 이해안되는 풍속도 있다.이것도 이족 가운데 한 종족의 결혼 풍속이다.신랑.신부가 결혼을 하면 식이 끝난 다음 그날로헤어진다.그리고는 다시 만나지 못한다.마치 견우와 직녀이야기 같다.어떻게든 신부가 남의 자식을 낳아가지고 돌 아와야만 드디어 신랑.신부가 합쳐진다.그리고 백년해로 하며 잉꼬부부처럼 행복하게 산다.
이 종족은 재산을 상속할 때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나눠준다.그러나 큰 자식에게만은 재산을 물려주지 않는다.역시 자기 자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소족과 이족의 기이한 풍속에 대한 취재를 마친 탐사팀은 다음날 일찍 옥룡설산(玉龍雪山)으로 향한다.여강에서 북쪽으로 24㎞ 떨어진 곳에 옥룡설산이 있다.미니버스가 시골 자갈길을 한30분쯤 달렸을까….갑자기 설산의 위용이 시야를 가로막는다.한마디로 장엄하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한다.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5,600m의 거대한 진회색 바위산봉우리와 가파른 경사면에 덮여있는 만년설(萬年雪)이 햇빛에 유난히도 반짝거린다.그런데도 설산은 주위의 온갖 왜소한 것들 사이에서 태초의 모습 그대로 우뚝 솟아 의연한 자세로 영겁의 세월을 침묵하고 있다.
어느덧 미니버스가 설산밑으로 형성된 초원지대 입구에 들어선다.노란 색깔의 초원에는 장족(藏族)들이 기르는 야크떼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초원과 설산이 맞닿은 지점에는 늘 푸른 침엽수림이 그 너머로 보이는 설산과 대조를 이뤄 한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해발 5,600m 만년설산 위용 미니버스가 침엽수 사이로 난 길을 꺾어 돌자 갑자기 가파른 언덕을 의지하고 서 있는귀틀집 두어채가 나타난다.
귀틀집은 산에서 베어온 통나무를 정방형으로 짜맞춰 벽을 만들고,지붕은 나무 껍질이나 풀로 해 덮은 모양의 것이다.우리 나라에서는 지리산.태백산맥.개마고원.낭림산맥.울릉도 등지의 산간지방에 귀틀집이 있었다.아마도 귀틀집은 예부터 전 해 내려온 우리나라 산간지방의 대표적인 가옥형태였을 것이다.지금으로부터 1천7백년전의 사서에도 우리나라 귀틀집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그 나라는 집을 짓는데 나무를 얽어매 마치 감옥과 같이 만든다고 한다」(三國志 東夷傳 弁辰).
탐사팀 일행이 귀틀집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데 30대 초반의 집주인 남자가 조랑말을 끌고 나타났다.자기는 이족인데 옥룡설산에서 약초도 캐고 해발 4,000m 위에 있는 삼강평원까지 길안내도 하면서 산다고 했다.
30대의 귀틀집 남자로부터 옥룡설산에서 산다는 괴수(怪獸)이야기를 듣는다.설산에서 산다는 이 괴수는 어쩌다 한번씩 나타나는데 생김새가 큰 오뚝이 같다고 했다.쫓아가면 어찌나 빠르게 두 발로 절벽을 기어 도망가는지 붙잡을 수 없단다 .
설산과 괴수.썩 어울리는 이야기다.설사 귀틀집 남자 이야기가사실이 아닐지라도 저처럼 장엄한 모습의 만년설산에는 불가사의한전설 하나쯤은 있어야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 본다.
설산 탐사를 마친 일행은 다시 여강으로 되돌아 섰다.
***雪山엔 雪人같은 괴수출현 여강으로 돌아온 탐사팀은 점심을 먹은 다음 시내에 있는 동파문화연구소(東巴文化硏究所)를 찾는다.입장권을 사 안으로 들어가 보니 분위기가 옛 왕궁의 후원같이 화려하면서도 고풍스럽다.큰 연못도 있고 팔각정도 아담하게지어 놓았다.
그러나 이곳만 중국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조랑말과 염소가 끄는 달구지가 손님을 부르고 연구소와 박물관 안에는 상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물건을 팔고있다.중국은 어디를 가나 학문과 장사가 공존하고 있는 특색있는 지역이다.탐사팀이 먼 저 본 것은나시족의 소라악기였다.우리의 옛 조상들이 불었던 것과 너무 닮아 정다운 느낌이 들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가운데 유달리 필자의 호기심을 끈 것은 나시족의 상형문자(象形文字).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처럼 사물을 그림으로 그려 만든 복잡한 글자인데도 필자가 그토록 감동받은 까닭은 따로 있다.세계를 돌아다녀보면 어느 민족이 나 말은 있어도 글자가 있는 민족은 드물다.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들,아시아의 베트남.인도네시아.필리핀 같이 큰 나라도 자기네들의 고유한 글자가 없어 로마자를 빌려 사용하고,이웃나라 일본마저 중국 한자를 간략하게 모방해 사 용해 왔다.필자는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세종대왕의 민족문자 창제가 왜 그토록 위대한 업적인지를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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